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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 에이드 Sep 07. 2021

[소설]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11)

검은 산 (by 페퍼톤스)

나 술 쎈거 알죠? 앵간하면 필름 안 끊기거든요.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필름이 끊겼어요. 분명 바보랑 술 마시고 있었는데… 언제까지 마셨는지 지금도 기억이 안나요. 그냥 정신차려보니 기차 안이더군요. 나중에 바보한테 들어보니 정신 못처리는 와중에 계속 집에 가겠다고만 중얼거렸대요. 그래서 택시에 태우고 집에 보냈는데 당연히 본가로 들어갈 줄 알았대요. 대충 추측해보니, 그 집에 간다는 말이 대구 본가가 아니라 경기도 자취방이었나봐요. 그래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나봐요. 희한하게도 또 표는 제대로 끊었더라구요. 여튼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잠들었어요.

하루종일 그냥 누워만 있었어요. 아무생각도 안나더라구요. 뭔가를 하긴 해야하는데,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난 지금 뭐하는거지? 뭘 해야 하는거지? 그렇게 멍하니 있다 잠들다 다시 멍하니 있다 그랬던거 같아요. 그러다 저녁쯤 되서야 그냥 밥 한숟갈 퍼기 위해 일어났죠. 폰에 연락이 가득 쌓였더라구요. 바보가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낸 톡, 그냥 죙일 자서 못봤다고 답했어요. 일 많이 바쁘나? 출근한다고 내려오지도 못하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는 엄마의 톡, 혹시나 해서 본가에는 일있어서 못간다고 했었는데, 그러길 잘한거 같았어요. 전화해서 그냥 잘있다고 바빴다고 짧게 전화했어요. 선배, 이번에 새로 나온 게임 해봤냐는 쭈와 걔의 단톡대화… 이것저것 둘의 잡담으로 100개정도 쌓여있었다. 단톡방, 나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가기 버튼은 누르지 못하고 그냥 알람만 껐어요. 대충 저녁챙겨먹고 인터넷 좀 검색하다가 다시 잠들었어요. 내일 출근하기 싫다. 그런생각에 자리에 누웠어요. 아무일도 없었던 일요일은 그렇게 끝났어요.


차라리 일요일에 이것저것 잡생각이 많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혼자 이불속에서 이것저것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월요일 출근 이후에 걔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나에대한 자책감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어요. 난 왜 우물쭈물해서 걔를 놓쳤는지… 언제부터 바보 동생과 걔가 친했던건지… 앞으로 걔한테 잘해주기는 힘들겠지… 걔가 원하는 꿈을 이뤄주기는 어렵겠지… 난 왜 걔한테 고백을 못했는지…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아니 자리에 앉아 있는게 불가능했어요. 결국 팀장한테 갑자기 일이 생겼다 하고 조퇴를 했어요.


역시 막상 얘기할라니지금 생각하니 너무 부끄럽네요.  이후의 그때는 이게 맞다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절대로 해서는 되는 짓이었다고 생각해요. 하는게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솔직히 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만약 과거를 지울  있다면  부분은 지우고 싶네요. 그래서 무슨 일을 했냐고요? 간단해요. 걔를 찾아갔어요.


조퇴하자마자 바로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어요. 기차 안에서도 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들었죠. 과연 내려가는게 맞는지, 지금 걔를 봐서 뭐하자는 건지, 도대체 난 무얼 하고 있는건지… 덕분에 내려가는 시간이 그렇게 지겹지는 않았어요. 덕분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원… 여튼 한 5시 반쯤? 걔가 있는 도서관에 도착했어요. 걔도 놀랐죠. 월요일에 여긴 어떻게 왔냐고. 대충 오늘 연가쓰고 안올라갔다고 둘러댔어요. 그리고 이제 올라갈라고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고 했어요. 그리고 6시 퇴근 후, 도서관 바로 위에 있는 카페에 갔죠. 시작은 평소와 같이 쓰잘데기 없는 잡담으로 시작했지만… 이러면 평소처럼 별 말도 못하고 또 헤어지게 될까봐 맘 단단히 먹고 말했어요.


실은 그날… 그저께 할러고 한 말이었는데… 이미 늦었고, 의미도 없지만… 나 너 좋아해. 실은 이거 말하려고 오늘 왔어. 미안….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잖아요? 외양간 부서졌는데도, 괜찮겠지, 뭐 오늘 재료가 없네,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소를 잃어버리고 크게 후회했을 거예요. 그렇게 후회만 하다가 자기가 했어야 하는, 하지 않을 일을 마무리짓자, 그 생각으로 외양간을 고쳤을 거예요. 그리고 다 고치고 나서, 소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거라고… 뭐 멋대로 생각해 봅니다.


나도 그랬어요. 걔한테 하지 못한 고백, 내가 했어야 하는 일, 늦었지만 해야 했다. 그래야 나와 걔의 관계가 정리된다, 후회가 정리되야 내가 보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한 거죠. 그리고 걔한테도 얘기했어요. 내가 너희 관계 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질투나서 깽판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하지 못한 말에 너무 후회가 남아서 이렇게 얘기하게 됐다고. 내 얘기를 들은 걔는 잠깐 아무말 없이 자기 얼굴을 쓸더니 미안하다고 나한테 얘기하더라구요. 안그래도 상협선배가 저 형이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최근에 말을 했대요. 에이 설마하고 있었는데, 진짜 자길 좋아할 줄은 몰랐대요. 솔직히 걔가 나한테 잘못한 건 없죠. 그래도 걘 그냥 나한테 미안하다고만 했어요. 진짜 미안할 짓을 한건 나인데…


그 후,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어요. 걘 그래도 자기한테 솔직하게 얘기해준게 고맙대요. 그리고 이 일로 연락 끊고 그러진 말자, 좋은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 이런 얘길 하면서 좋은 선후배로 지내기로 했죠. 에휴… 그때 그냥 연락 끊어버렸어야 했는데… 어쨌든 다시 이래저래 잡담, 나중에 쭈랑 같이 만나서 저녁 먹기로 한 약속, 커피이야기 등등… 얘기하다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나도 걜 다시 편하게 볼 수 있었고 걔도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카페를 나와 우린 헤어졌어요. 그리고 기차를 타고 올라갔어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마음은 많이 편해졌어요. 그렇다고 걔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사라진 건 아니었죠. 그냥… 걜 보낼 수 있게 됐고… 보내면서 받게 될 아픔을 견딜 수 있게 됐을 뿐이예요.

달빛은 산길을 비추고

바람은 노래를 부른다

나는 달려간다

검은 산을 넘어

나를 기다리는 너에게


검은 산이라고 펩톤 노래인데, 기차타고 올라가는데 이어폰에서 이 노래가 나오더라구요. 평소에도 폰에 노래 이것저것 많이 넣고 랜덤 돌려서 듣는데, 이 노래가 그때 폰에 담겨 있었어요.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듣는데, 괜히 눈물이 나더라구요. 이젠 창밖에 보이는 저 검은 산을 넘더라도 나를 기다리는 걔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날 이후, 이 노래는 절대로 듣지 않았어요. 괜히 그날 생각나서 도저히 못듣겠더라구요.


대략 2년? 그정도 됐을 거예요. 2년간의 내 짝사랑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렇게 바보같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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