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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 에이드 Sep 10. 2021

[소설]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13)

너의 노래 (by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하루, 이틀, 한주, 두주, 한달, 두달... 그렇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계속 보내고 있었어요.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집에 들어와서 TV보다 자고, 다시 일어나서 출근하고, 한번씩 쭈하고 업무적으로 얘기하다가 답답해서 투닥거리고, 그걸 또 단톡방까지 끌고와서 걔한테 누가 잘했니 못했니 왈가왈부하고, 그러다 다 해결되면 단톡방에서 셋이서 쓸데없는 잡담하고... 그날 이전과 별반 다를거 없었죠.

아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생활은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좀 많이 바뀐거 같아요. 결단력이 생긴게 그날 이후였어요. 언제나 후회하고 있었죠. 내가 우물쭈물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어도, 내가 마음 먹었을 때 바로 고백만 했더라도... 예전에는 무언가 하려면 혹시 나중에 잘못되지 않을까? 만약 실패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고민 많이했었는데, 이제는 일단 지르고 보자는 마인드를 가지게 된 거죠. 예전같으면 게임기 하나 살려고 하면 열심히 돈모아서 집 마련해야되는데, 일한다고 겜할 시간도 없을건데 하며 주저했었는데, 지금은 일단 사고 보자. 까짓것 술 한번 안마시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막 지르니까요. 전에 어쩌다보니 내 인사평가 보게 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적극적이고 결단력 강하다고 적혀 있긴 하더라구요. 결단력 따위... 일할때 가져봤자 의미없는데...


그리고 취미생활 하나 생겼네요. 언제 출장으로 박람회 한번 갔는데, 거기 기념품이라고 스마트폰 터치펜을 주더라구요. 뭐, 사과펜같이 비싼거 말고, 다있소같은데서 파는 천원짜리 터치펜요. 받긴 받았는데, 솔직히 손가락이 편하고, 그냥 펜에 달려있는 볼펜이나 쓸까 했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만약 내가 그림을 잘 그렸다면? 아니, 잘 그리진 못하더라도 취미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면, 걔랑 함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림실력은 완전 젬병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미술점수를 70점을 넘겨본 적이 없어요. 그마저도 30점이 이론시험점수... 한마디로 꽝손, 아니 똥손이었죠. 특히 선 긋는거나 세밀하게 색칠하는거 진짜 못했어요. 안그래도 수전증 있는데다가, 섬세한 작업은 저랑은 안맞더라구요. 그런데 종이에 펜으로 그리다 잘못하면 고치기도 어렵고, 종이를 버려야 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태블릿 pc, 그러니까 제가 갖고 있는 사과패드에 그림을 그리는 건 지우기도 쉽고, 종이나 물감 같은 재료값도 안들잖아요. 결정적으로 레이어라는 기능, 진짜 레이어라는 개념 만든 사람 노벨상 줘야돼요. 한장은 스케치, 한장은 색칠, 한장은 명암 이런식으로 각각 따로따로 그린 다음 핫케이크처럼 포개면 그림 하나가 완성되다니. 종이에 그렸으면 스케치 위에다 색칠하다 삐져나가면, 삐져나간거 수습하다가 스케치도 망치고 색칠도 망치고 그러던데, 사과패드에 레이어 구분해서 그리니 색칠 삐져나간거 고쳐도 스케치는 영향을 안주니 쉽게쉽게 수정이 되더라구요. 에구, 이야기가 또 딴데로 샜다. 내가 레이어 예찬할라고 말 꺼낸게 아닌데...

아무튼 사과패드에 그림 앱을 깔고, 뭘 그려볼까 하다가 그냥 내 모습을 그려봤어요. 이유는 뭐 그냥... 그리기 젤 쉬워보였달까? 나름 내 모습 미화도 좀 시켜보고 싶었고요. 다있소 터치펜 써보면 알겠지만 사과펜처럼 디테일한 표현은 불가능해요. 연필이나 볼펜같은 느낌은 기대하면 안돼요. 오히려 붓으로 쓰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오히려 그게 저한테는 맞았던거 같아요. 안그래도 둥글둥글하고 단순한 그림이 취향인데, 좀 큼직하게, 둥글게, 그리고 단순하게 제 모습을 그려나갔죠. 펜 문제도 있고 손떨림 문제도 있고 해서 애초에 현실적인 그림은 포기했어요. 최대한 만화스럽게, 그리고 단순하게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려나갔죠.

되더라구요. 이게 처음 그린 그림인데... 지금보니 되게 부끄럽네요. 그래도 그림이 그려진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더라구요. 그리고 동시에 난 왜 이걸 이때까지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더라구요. 그림을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다면 걔랑 함께 있을 수 있었을텐데... 함께 나눌 수 있는게 있었을텐데...

전에 물어봤을때 대충 사연있어서 늦게 그림 시작했었다고 얼버무렸죠? 그 사연이 이거예요. 그림을 좋아하는 걔와 함께하고 싶어... 아니, 그림을 못그려서 함께하지 못한... 그림만 그릴 수 있었으면 걔와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로 인해 시작하게 된거죠.


그날 이후, 퇴근하고 집에 오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제껏 내가 살면서 겪은 일, 느낌, 감동,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만 그려왔었던 상상들. 그것들을 이젠 나도 머리속에서만이 아닌, 손끝으로 그려나갈 수 있게 된거죠. 내 취향이기도 했고, 아까도 얘기했듯 싸구려 터치펜으로는 디테일한 표현이 불가능했기에, 색을 번지게 하는 수채화나 뭉개서 표현하는 파스텔효과를 주로 사용했어요. 그렇게 한장한장 차곡차곡 나의 그림을 그려나갔어요.


걔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만약에...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걔한테 보여줄 그림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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