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여름날의 오이냉국
처서 (處暑)가 지났다.
처서 매직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 처음에 들었을 때 이 드라마틱한 말이 재미있었다. 처서만 지나면 날씨가 마법같이 시원해진다라는 뜻이란다. 입추에 가을을 느껴본 적 없고 입춘이어도 패딩점퍼를 벗을 수 없는 거 보면 그 이름이 붙은 날은 마법처럼 그 날씨나 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 든다. 마치 등산을 가서 내려오시는 분들이 '5분만 더 가면 돼요.'라고 말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래, 처서는 지났지만 박완서 님의 글처럼 늦더위가 복중보다 오히려 집요하고 짜증스러울지 모르겠다. 마지막 더위의 참맛의 시작인 것이다.
더위가 끝없이 이어지는 날들 중간중간, 밥상을 차리다 보면 머릿속이 아득해질 때가 있다. 3구 가스레인지가 활활 불을 지피고 있으면 시원한 한 그릇이 떠오르곤 하는데 사실 아무리 시원한 음식인들 불이 안 닿을 수 있나 생각해본다. 냉면만 해도 면을 삶아야 하며 계란도 두어 알 삶아내야 한다. 채소반찬 한두어 개 슥슥 무쳐 담아 먹는 것도 허전해지고 국물 한 그릇 후루룩 먹고 싶은 날에, 특히 여름 시작점이 아닌 여름 밥의 끝무렵에 갈 즈음에야 나는 늘 이 음식을 떠올려내곤 한다. 얼음이 동동 떠있는 오이냉국 말이다.
갈비탕이나 육개장 같은, 그러니까 커다란 탕기를 꺼내어 담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소고기 뭇국이며 먹는 것만으로도 보양식 느낌의 사골국도 아닌, 익히지 않은 채소에 찬물을 부어 담아 먹는 이 날것의 국 한 그릇이 여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5분만 더 가면 되기 전에 먹는 마지막 여름음식이라 생각한다.
입사 1년 차 시절,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에게 비가 죽죽 오는 여름날 전화가 왔다. 오늘 점심메뉴로 오이냉국을 내놓았는데 비가 죽죽 온 탓에 날은 무덥지 않았고 그 덕분에(?) 손님들은 국이 부실하다며 한소리씩 하셨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국만으로도 오늘의 메뉴의 중심이 되는 날이 있는데 오이냉국은 푸짐하게 고기반찬이 나가는 날이나 좀 인정이 될까 햇볕 쨍쨍해서 그저 시원한 거나 들이키고 싶은 날을 빼면 시시한 국으로 취급받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니 고깃집이나 닭갈비집의 늘 나오는 메뉴로, 딱히 신경 쓰이지도 그 맛을 극찬하지도 않는, 매운 거 먹으면 입가심 정도로 여겨지며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오이냉국을 만들어 먹을 때면 미역국 집도 생기는 요즘에 주연이 되지 못하는 오이냉국의 안타까움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동치미 국물과는 또 다른 시원한 국물이 오이냉국 말고 뭐가 있겠어!라고.
주연이 아니면 뭐 어떻습니까.
닭갈비집의 오이냉국이 없다면 사이다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느낌일 것이다. 두어 번 더 사장님께 청하여 먹어도 푸짐하게 내어주시는 오이냉국이 좋다. 집에서는 냉국을 한 사발 만들어 묵을 썰어 넣어 먹고 우무 국수도 말아서 먹는다. 뽀얀 분이 피는 여름 감자를 쪄먹을 때 같이 마셔도 좋다. 물기 많은 오이며 맵지 않고 아삭한 양파며 혀끝에 찰싹 붙는 시원한 미역이며 새콤한 식초의 끝 맛이 맛 좋은 음료수나 뜨겁고 묵직한 국과는 다른 매력이 넘치는 것이다. 다른 계절에도 먹는다면야 충분히 먹을 수 있지만 여름 끝자락의 오이냉국은 계절의 호사 같은 느낌이다. 양념의 맛도 화려하지 않고 식초와 소금과 설탕 간장만 있으면 희한하리만치 깊은 맛도 나니 할머니가 담가주신 콤콤한 국간장을 한병 얻어서 집에 오는 날에는 영락없이 오이냉국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리도 아닐 것이다. 그 한 숟가락으로 여름날의 마법 같은 국이 완성되니 말이다.
냉국은 우리나라 말로는 찬국이라고 한다. 옛 음식책에는 '창국'이라고 표기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창은
한문으로 暢, 화창할 창이다. 세상에나, 이렇게 멋진 국이 어디 있을까. 처서는 지났고 여름은 분명 한 계단 한 계단을 내려갈 것이다. 8월이 엿새 남았다. 8월이 가기 전에 화창한 국 한 그릇 하시길 바란다.
재료
오이 한 개
당근 50g (약 1/4개)
양파 60g( 약 1/3개)
미역 5 g
청고추, 홍고추 1개씩 (매운 걸 좋아한다면 청양고추로)
양념
소금 1/3T
식초 4T
국간장 3T
매실액 6 (설탕을 넣는 경우 2T
다진 마늘 1/2T
1. 건미역은 불린다.
2. 오이, 당근, 양파를 채 썰어준다.
3. 고추는 어슷하게 썰어준다.
4. 불린 미역을 그냥 써도 되지만 끓는 물에 데치는 느낌으로 끓여준다.
(물이 끓으면 넣었다가 삼십 초 후 건져내면 된다.)
5. 양념을 넣고 잘 섞어준다.
6. 얼음 양을 포함해서 800ml 물을 넣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