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Oct 22. 2020

할머니는 이제 그 맛을 잊어갈 거야

나의 할머니와 호박찜


가끔은 이름이 없는 음식도 있다.


35년생 돼지띠인 나의 외할머니는 음식을 못하셨다. 보통의 외할머니의 손맛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음식이 기억나며 주변을 보면 우리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너무 좋다 라는 기억은 흔하게 가지고 있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나의 외할머니는 그런 음식이 딱히 없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경기도에서 쭉 자란 나는 여름방학이면 전주 외가댁에 갔는데 할머니 댁에서 배불리 먹었던 것은 복숭아 과수원을 하신 덕에 지천에 널려있던 복숭아뿐이었고 딱히 어떤 음식을 잘 먹었는지, 할머니가 우리가 갈 때면 손주들을 주려고 이것만은 신경 써서 하셨어라는 음식이 없다는 게 당황스럽게 다가온 적도 있었지만 6남매를 키우느라 손끝이 닳은 시골 아낙네로 할머니를 바라보면 뭐, 음식을 정성스럽고 신경 써서 할 틈이 없었지.라는 결론이 나온다. 거대한 농사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는 워킹맘 배효순 여사님이었으니.


그런 할머니의 별거 없는 음식 속에서도 유난하게 맛에 기억이 있는 음식이 있는데 그게 참 딱히 이름이 있는 음식이 아니라서 우리도 늘 '그, 왜 있잖아. 둥근 호박이랑 민물 새우 넣고 끓여주신 거.'라고 표현을 하거나 새우 호박 지짐, 새우 호박찌개, 새우 호박찜 등등 그때그때 어울리는 거 같은 이름으로 대강 부르곤 했다. 그러나 모두의 머릿속에 있는 그 음식의 이름은 '그, 왜 있잖아. 할머니가 해주던 거, 호박이랑 새우 넣고.'가 되었다.



둠벙둠벙 자르는 것이 포인트. 사실 애호박 말고 둥근 호박이어야 하는데.



이 음식은 그러니까 굉장히 묘한 포인트가 있는데 찌개라고 하기에는 국물이 적고 그렇다고 찜이라고 하기에는 국물이 자박자박하고 그래서 조림이라고 하기에는 생선조림 이런 것과는 차이가 있고 시래기 된장 지짐처럼 그런 지져먹는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호박은 무르고 국물이 흥건한 느낌인 것이다. 밭에서 따온 둥그런 호박을 일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큼직하게 잘라서 민물새우를 잔뜩 넣고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어서 끓인 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는데 뜻밖에 맛은 감칠맛도 돌고 칼칼하니 좋아서 어린 시절부터 매운 거 좋아하던 나는 유일하게 입맛에 맞는 할머니의 음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할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에만 음식을 했던 기억이 있고 조금 자라고 나서는 모이는 날에는 엄마와 이모들, 숙모들이 음식을 했으니 할머니의 맛은 물 고춧가루 향기와 황석어젓 내음이 진한 김장김치뿐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할머니는 김치를 담그시는 걸 좋아하시지만 이상하게도 김치는 할머니의 맛이라고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조리과정이란 게 없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도 들깨 농사며 쌀농사며 큰 규모까지는 아니지만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저곳에 농사를 짓는다고? 하며 바라보면 꽤나 넓은 규모에 농사를 지으신다. 내려가면 자꾸 뭐를 챙겨주신다. 김치가 있는지 쌀이 있는지 자꾸 챙기신다. 아마도 그것만 있으면 그래도 먹고 산다라고 35년생 할머니는 생각하시는 듯하다. 나는 할머니가 주는 건 따복 따복 잘 가져오는 편이고 그걸로 오만가지를 해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마 조만간 내려가면 할머니는 들기름 짠 것이라며 주실 것이다. 소주병에 담긴 그 들기름을 가져오면 나는 계란 프라이까지는 그 들기름으로 해서 먹는다.


이런 나의 할머니가 올해 추석 전에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물론 자식들을 알아보시며 말씀하시거나 일상생활 속에서는 크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가까이에서 사는 가족들은 낯선 할머니의 모습을 한 번씩 보는 듯했다. 막연하게 티브이에서만 보던 그 치매는, 그러니까 가족 이름을 잊고 본인을 잊고 잊어간다는 것에만 너무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추석에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 할머니는 외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산에서 한아름 주어오신 밤을 주셨다. 여전히 본인이 농사지은 거라던지 먹을거리를 주고 싶어 하시는 할머니는 늘 보던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3년 전쯤인가, 배추 된장국을 끓여 할머니 식사를 챙기는 나를 가만히 보시며 '나는 이제 뭘 끓여먹는 걸 잊어버렸어.'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이 났다. 그땐 그냥 "숙모랑 이모랑 엄마가 해드리니까 안 하다 보면 잊은 거 같이 느껴질 수 있어, 할머니."라고 했는데 어찌 보면 그게 아니었던가 싶다. 늘 바쁘게 밭일을 하고 해가 질 무렵에 집에 들어와 밥을 해야했던, 쫓기는 듯한 요리만을 했던 할머니가 쫓기지 않아도 될 때에 와서는 점점 밥을 할 기회가 줄고, 그러다 기억에서 밥을 하는 것이 멀어졌던 건 아닐까.


지금은 그저 할머니가 본인의 병에 쫓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둠벙둠벙 썰어 넣은 둥근 호박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했었던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음식은 아마도 계속 이름이 없을 것이지만 나의 할머니가 해준 음식으로 기억하는 것에는 손색이 없다. 그 맛을 잊지 않고 살아갈 테니 할머니도 많은 것들을 잊지 않고 부디 잘 지내주시길 바란다. 바쁘지 않아도 돼, 할머니.



할머니의 맛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기억을 한번 더 해보고 싶은 맛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요리를 하기도 한다. 호박찜을 해보자.



재료

애호박 한 개(약 300g)

쪽파 한줄기(대파도 가능)

새우젓 1T

고춧가루 1T

다진 마늘 1/2T

검은깨 소량

물 100ml


1.  마늘을 다진다. (마늘은 생략해도 된다.)

2. 파는 쫑쫑 썰어주고 호박은 깎아 썰기 하듯 일정한 모양 없이 잘라준다.

3. 팬에 호박을 넣고 고춧가루를 뿌린 뒤 새우와 마늘을 넣어준다.

4. 물을 넣고 중간 불에서 한 김 오르게 끓여준다.

5. 한 김 오른 뒤 불을 약하게 줄이고 파를 넣어준 뒤 8분 정도 끓인다.

6. 불 끄고 뚜껑을 덮어 5분 정도 뜸을 들여준다.


이전 10화 파래무침을 먹는 날은 겨울바다가 종일 코끝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