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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27. 2020

벌써 그리운 더위와 열무 비빔국수

지나간 국수들과 열무 비빔국수


여름에 태어난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살갗에 끈덕하게 묻어나는 더위도 좋아하고 상점들 문을 열 때  파도가 밀려오는 듯 차가운 에어컨 느낌도 좋아한다. 바삭한 모시이불을 좋아하고 늦게 늦게 해가지는 여름밤을 좋아한다.


그런데, 올 주말부터 꽤나 추워진단다.

동지팥죽과 붕어빵 한겨울에 먹는 찰떡 아이스는 좋아한다. 두터워지는 옷, 오그라드는 어깨, 공원에서 한참을 앉아있을 수 없는 찬바람, 질척해져서 회색 죽같이 변해버리는 녹아내린 눈은 반갑지 않다. 그래도 알록달록 두툼한 양말을 신을 수 있는 건 좋다. 물론, 맨발을 가장 사랑하지만.


진한 초록이 그득한 여름이 좋다.

여름에 여름을 애찬 하는 것도 좋지만 겨울에 그리워하는 여름도 좋다. 모든 것이 끝이 나고 지나간 것을 애틋해하는 기분 역시 좋다. 햇열무가 나오는 계절을 핫팩을 끌어안고 책상 앞에 앉아 그리워해 본다. 그리고 지나간 나의 국수를 그리워해 보기로 했다.




국수 삶는 냄새를 좋아한다. 세탁소 냄새를 좋아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독산역에 있는 회사를 다녔었다. 꽤나 예전 이야기다. 점심시간은 보통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지하에는 구내식당 말고도 몇몇 식당이 있었고 한 번씩 돌아가며 먹었다. 직장인의 점심식사라는 건 매일 기대하지만 매일 기억에 남지 않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우리 회사 건물에서 차로 5분여쯤을 가면 칼국수집이 있었다. 골목에 있는 칼국수집이었는데 이층으로 오르는 예스러운 계단을 오르면 바닥에 옹기종기 앉아서 국수를 먹는 모양새였다. 닭칼국수와 바지락 칼국수가 있었고 가격이 저렴했다. 한 번씩 직원들은 차에 꽉 끼어 앉아서 그 국숫집을 갔다. 후루룩 국수를 먹고 들어오면 점심시간이 아슬하게 남아있긴 했지만 그렇게 나름의 직장인의 구내식당을 벗어난 외식은 즐거웠다. 그 집 칼국수는 맛이 쨍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지루하고 텁텁해진 입맛에 양념이 쨍하고 국물이 맛깔났던 그 칼국수는 외식이라는 단어에 어울렸다. 퇴사하고 나서도 그 칼국수집이 한 번씩 생각이 났는데 우리 집에서 독산역은 시간반은 가야 하는 곳이고 솔직히 홀로 찾아가라면 회사 건물에서부터 출발해야 할거 같아서 그리워만 하자라는 결론을 내고 포기했다. 오늘도 그 2층 자리에는 직장인들이 옹기종기 앉아 쨍한 칼국수를 먹었으면 좋겠다.


삼십 대 초반에는 석촌호수 역 인근에서 일을 했다. 업무가 정시출근 정시퇴근이 아니고 유동적이었던지라 점심시간은 묘하게 건너뛰기 일수였고 이래저래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분명 음식에 관련된 일을 한 주제에 모두 다 텅 빈 배를 가지고 물만 마시고 있는 저녁을 맞이하곤 했다. 먹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지만 종일 뭘 먹었나 돌이켜볼 수 없는 우리는 사무실 앞에 있는 국숫집에 자주 갔다. 멸치국수와 막걸리를 팔던 그 집에서 국수를 후루룩 들이켜고 막걸리를 마시며 한숨을 내쉬고 나면 밖이 어둑해졌다. 멸치육수가 달았다. 그 집은 내가 일을 그만두고 나서 얼마 후에 사라졌다고 했다. 끼니를 지나 먹는 멸치국수와 막걸리는 삶에 없는 것이 좋겠지만 허기 진 입에 촉촉하니 달았던 그 느낌은 한 번씩 그립다.




손가락으로 찍어 쪽 하고 맛볼 때의 쾌감. 비위생이고 뭐고 포기할 수 없는 쾌감.




열무김치를 좋아한 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이야 그 쌉싸래한 맛이 뭐가 좋았겠나. 나이가 드니 쓴 커피도 좋고, 쓴 소주도 좋고, 씁쓸한 나물도 좋아진다. 쓴 맛 뒤에 오는 미묘한 맛들은 훨씬 더 매력이 있다. 그저 쓰기만 하면 왜 먹을까. 열무를 슬슬 좋아하게 된 것도 아마 쓴맛 뒤에 오는 상쾌함이 좋아서겠지.


'햇'이라는 말이 붙으면 뭐든 다 빛이 나 보인다. 그중 햇사과와 햇열무는 그 싱그런 초록을 덤으로 주는 거 같아 좋아한다. 아오리 사과와 열무. 더위가 오는 느낌이 어찌 싫을 수 있을까 싶다.

 칠십 나이쯤을 평생으로 본다면 초중기 정도의 살림을 하고 있는 중인가 보다. 집안 살림에도 세월이 시작되었고 호닥호닥 거리며 밥해먹던 신혼 초기도 지났다. 한 번씩 혀가 늘어지게 청소를 하고 나면 허기진 입에 뭐라도 넣고자 예전 같으면 컵라면에 물을 부었겠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한여름, 선풍기도 켜지 않고 창문을 열고 이래저래 걸레질까지 마치고 나면 후다닥 국수를 삶아내어 비비거나 찬밥에 고추장과 김치를 넣고 석석 비벼서 먹기를 좋아한다. 더운 입맛에 단것보다 쓰고 물이 잘 오른 열무를 한입 먹으면 그게 쓰면서 달았다. 조물조물 국수를 무쳐서 그 무친 그릇째로 들고 앉아 먹어도 맛이 좋았다. 여름 저녁밥으로 넘쳐나는 푸성귀를 썰어담아 전을 부쳐 비빔국수와 함께 먹는 건 행복이다. 에어컨 바람을 오래 쐬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밥을 할 때 뒷덜미에 더위가 내려앉는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물기 가득한 열무만 있다면, 여름은 입맛이 돈다. 입이 쓰지 않아 진다.




뭐,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쁘니까.



요즘이야 제철 없이 이것저것 마트 진열대에 있으니 사실, 당장 못 먹어서 어찌 될 거 같은 그런 거야 적지만 지나간 맛을 그리워하는 것, 그 맛을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 좋아하는 수박도 철이 지나면 굳이 사 먹지 않는다. 이제 본격 추위가 시작이 될 테고 우리는 겨울 음식을 풍족하게 누릴 시간이다. 내년에 만나게 될 여린 햇열무를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계절메뉴 게시!라는 반가운 문구가 식당 앞에 걸리면, 마스크를 쓰지 않는 더위가 온 날, 우리 집으로 놀러 와. 한여름, 국수를 한솥 삶아 참기름 아끼지 않고 열무김치와 비벼서 네 입에 넣어줄게. 함께 반가운 여름을 먹자."

 



코로나가 끝난 여름의 맛을 기대해본다.








재료 사진이 묘하지만, 열무 비빔국수를 내년에 만들어 보자.



재료

열무김치 한 컵

소면 100g

참기름 1 T


양념장

고추장 1T

간장 1T

식초 1/2T

마늘 한알

파 소량

깨 1t

매실액 2T



1. 마늘과 파는 다지고 양념을 넣고 섞어둔다.

2. 열무김치는 3cm 크기 정도로 자른다. (물론 취향대로 하는 게 좋다)

3. 냄비에 물과 소금을 넣고 끓이다가 물이 끓어오르면 국수를 넣는다.

4. 거품과 함께 부르륵 물이 끓어오르면 찬물을 반 컵 부어준다.

5. 다시 거품과 함께 부르륵 끓어오르면 불을 끄고 흐르는 찬물에 국수를 헹궈준다.

6. 물기를 제거한 뒤 참기름을 넣고 국수를 1차로 버무린다.

7. 양념장과 김치를 넣고 국수를 버무린 뒤 오이, 삶은 달걀 등을 취향대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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