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 파래무침
파래무침을 떠올리면 왜 온몸이 시려질까.
이상하게도 파래무침은 떠올리기만 해도 춥다. 차게 먹는 음식이긴 하지만 춥다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새콤한 맛도 그렇고 아삭한 무의 식감도 그렇고 파래 향도 그렇다. 그저, 춥다. 그러나 찬바람이 매콤하게 불기 시작하면 입에 침이 동그랗게 고이며 파래무침이 생각난다. 제철을 맞이하는 무와 파래가 반갑다. 겨울은 싫지만 겨울 음식은 싫어할 수가 없다. 상상만 해도 등이 시릿해지는 파래무침.
찬바람이 불 때 첫 파래를 사서 집에 오면 생각이 나는 날이 있다.
스물넷다섯 그쯤의 날이었다. 주말에 혼자 ktx를 타고 부산에 갔다. 종종 별 일없이, 만나는 사람 없이 혼자 부산에 가곤 했다. 낯선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역마살이 깊고 깊게도 들었을 때였나 보다. 지금 그리 돌아다니라고 하면 발뒤꿈치가 닳아 없어질까 걱정부터 시작할 거 같다.
점심 무렵쯤 도착하는 기차에서 내려 부산역 앞 살풍경을 부옇게 보다가 자박자박 걸어서 영주동 쪽으로 갔다. 오르막을 살짝 오르면 문을 옆으로 드르륵 밀고 들어가는 복국집이 있는데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온 깔깔한 입으로 복국 국물을 후루룩 먹었다. 그저 국물만 죽죽 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한 물수건을 주셨는데 그 물수건의 다정함이 좋았다. 웃풍이 도는 그 가게 안은 약간 비릿한 찬 내음이 둥둥 떠있었다. 밥을 말지도 않고 연신 숟가락으로 국물만 퍼댔다.
밥을 먹고 나서 영도에 갔다. 구비구비 버스를 타고 가는 영도를 꽤나 좋아했다. 남포동에 커다란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이었다. 나의 일상과 다른, 타인의 일상이 느껴지는 풍경을 좋아한다. 버스 종점에 내리면 태종대. 그럼 매표소에 가서 다누비열차표를 사고 길을 오르면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 내려서 한참을 또 멍하게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등대가 있는 쪽으로 걸어내려 갔다. 길은 험하지 않아 걷기 좋지만 바람은 한 번씩 고개를 돌리게 했다. 부산은 한겨울에도 맵게 춥진 않지만 태종대 바람은 기가 세다. 겨울바다 하면 내 주변에서는 동해바다를 떠올리는 게 보통의 반응이다. 강릉 커피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철썩철썩 깊은 바다색으로 몰아치는 동해의 파도가 아마도 전형적인 겨울바다의 모양새가 아닐까 싶지만. 나는, 부산의 따스한 겨울 햇볕과 숨이 한 번씩 컥 하고 막히는 태종대의 바람이 좋았다.
이십 대는 참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게, 용기라기 보단 뭔가 작은 다짐 같은 것이었는데, 자꾸자꾸 나를 다잡지 않으면 이리저리 엉망으로 뻗쳐 나오는 곱슬머리 같은 시절이었다. 항상 마음이 개구리밥처럼 떠있었다. 하는 일이 재미가 있으면서도 원하는 건 아닌, 겉모양만을 흡족해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순서에 맞는 삶을 살아갔지만 나는 엉망진창 순서로 살아가는 듯했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학 시간 같아서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야 하나 늘 그것이 고민이었다. 그럴 때, 나는 부산에 왔다. 홀로 낯선 이 공간을 익숙하게 돌아다니고 혼자 앉아 밥을 먹고 나면 조금은 살아갈 힘이 생겼다. 낯선 공간의 익숙함을 사랑하는 힘으로 익숙한 공간에서의 낯선 삶을 어른이 되어가는 표정으로 이어 나갔다.
태종대에 가면 작은 도서관이 있다. 중간에 한번 모양새가 바뀌긴 했지만 예전과 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80년대생인 내가 보아도 세월이 있는 책들이 있었는데 그중 처음 눈에 든 책이 어린 왕자였다. 그 뒤로는 그 책이 잘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그 작은 도서관에서 어린 왕자 책을 꺼내보고 잘 있는지 확인하고 도로 집어넣어두고는 거기서 또 바다를 바라보며 찬 손을 살짝 비비적해봤다. 그러고는 또 아래로 아래로 걸어 신선바위 쪽으로 갔다. 불어오는 바람을 다 들이켜 마시면 몸이 부풀어 올라서 펑하고 터질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바람을 고개를 숙여 피하기도 하고 한 번씩은 과하게 마시기도 하면서 말이다. 호올스 사탕 같은 겨울바다 바람. 그리고 늘 따스한 태종대의 햇볕.
태종대에서 나오면 남포동으로 갔다.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봤다. 뭔가 잘 짜인 일정처럼 그렇게 돌아다녔다. 그 순서를 지켜 하루를 보내고 7시 20여분쯤 기차를 타면 무릎이 오그라 들 듯 아팠다.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어서 서울에 도착하면 어떤 의식을 치른 기분이었다. 20대에는 그렇게 헛헛한 마음을 데리고 이리저리 흩날리듯 돌아다녔다.
부산을 안 간 지 3년이 됐다. 겨울바다가 필요 없어 진건 아니지만 그 발걸음을 아끼는 나이가 되었다 . 그립다고 달려가서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득달같이 쏟아내지 않는 것이 진득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름 여기게 된 듯했다. 마음이 조금은 흩날리는 겨울날에, 파래 한 봉지를 들고 앙상해진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지나다가 하늘을 바라보면, 겨울바다를 보지 않아도 그냥 그 느낌이 나름 여기저기 일상에 있으니 괜찮다 싶다. 파래를 조물조물 만지며, 그 비릿하고 차가운 향기가 부엌에 퍼지면 겨울바다의 힘을 생각해본다.
그게, 참 달고 시원하고 시콤하면서도 다정했다.
재료
파래 두 덩어리(200g)
무 300g
소금 1t
깨 적당량
양념장
설탕 3T
국간장 1T
식초 6T
다진 마늘 1t
1. 양념장은 미리 섞어둔다.
2. 무를 얇게 채 썰어준다.
3. 무는 소금을 넣고 살짝 버무린 후 20분 정도 둔다.
4. 파래는 소금물에 담갔다가 흐르는 물에 여러 번 헹궈준다.
5. 무는 물기를 꼭 짜준다. (너무 힘껏 짜면 안 됩니다.)
6. 파래에 양념장을 넣고 먼저 무쳐준 뒤, 무를 넣고 무친다.
7. 깨를 뿌려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