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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Dec 03. 2020

시간 강박이라면 빵을 구워봅시다

느긋한 버터향과 옥수수 스콘

당신은 11시 기차를 예매했습니다. 몇 분 전에 기차역에 도착하십니까?


저는 늦어도 10시 30분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늦어도'입니다. 대체로 기차는 10분 전에만 역에 도착해도 탈 수 있죠. 기차역은 공항처럼 그렇게 드넓지도 않고 타는 곳도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화장실에 길게 가고 싶어 지면 어쩌지.' 또는 '역까지 가는 중간에 차가 막히거나 지하철 시간을 잘못 맞춰서 늦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하며 예매를 한 순간부터 조금은 조급해합니다. 10시 50분 시계를 떠올리기만 해도 다리가 동동 굴러집니다.


시간 강박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지각을 하지 않는 것이죠. 학교나 회사를 다니면서 천재지변에 의한 지각은 해보았지만 그렇지 않은 지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폭설로 지하철 1호선에서 강제하차를 당하고는 눈길을 울며불며 걸어서 출근한 날이 기억납니다. 정말 환장하겠군 이라는 느낌이더군요. 시간으로 질책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왜 이러는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매일매일을 잘 맞추어놓은 알람시계처럼 움직이며 살진 않습니다. 약속시간, 출근시간, 시험시간, 기차가 떠나는 시간, 영화 시작 시간 등, 이렇게 정해진 시간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101가지 것들, 이런 것을 생각하나 봅니다.


밀가루와 버터 냄새만 풍겨도 마음이 행복해진다.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꽤 긴 기간을요. 상담 선생님과는 한 시간 상담을 했습니다. 선생님 책상 위에는 엔틱한 탁상용 시계가 있었어요. 저는 상담시간이 시작되는 것을 체크하고는 중간중간 그 시계를 보며 대화의 양을 조절했습니다. 2시에 시작해서 3시에 끝나는 상담을 십여분 남기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선생님의 시간을 방해하면서까지 제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건 규칙이니까요. 2시에서 30분 정도의 시간까지는 한 번쯤 체크를 합시다. 그리고 15분여간은 두세 번씩 체크를 하죠. 나머지 십분 동안은 선생님 눈 한번 시계 한번 이랬나 봅니다. 두어 달 흐른 뒤 상담실에는 시계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시계를 치우셨네요?'라고 멋쩍게 웃으니까 선생님께서도 함께 웃으시며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셨어요. 물론 몸을 시계로 맞추면 얼추 한 시간을 느낄 수 있으니 '어머나, 세상에나. 저 조금만 더 이야기할게요.' 하는 일은 없었지만 힐끔거리지 않을 수 있어서 불안하게 편했습니다. 아마도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불안하게 편한 시계 없는 방.



옥수수라는 이름이 참 좋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옥수수다.



저는 불안한 일이나 골치가 아픈 일이 생기면 언제부턴가 그것을 하루 종일 날을 잡고 고민해보곤 합니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싶은 일이 생기면 두세 시간을 찻집에 앉아서 '자, 어디 한번 그 생각만 죽을 만큼 해보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정말로 질리도록 생각해봅니다. 걱정을 참으로 맛깔나게 잘하는 성격인지라 일상생활에 그것을 범벅으로 하게 두면 정말 끝도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고 스스로 싫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정면으로 승부를 보는 자세로 조마조마하지 말고 불안한 일은 탁 잡아서 해버리거나 막연하게 골치 아픈 생각들을 죽기 살기로 해버리고 나면 차라리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간 강박인 저에게 베이킹은 어쩌면 강박을 완화하는 특단의 조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이킹의 과정이 그렇더라고요. 시간을 잘 지킬 것, 미세하게 조절할 것, 정량을 지킬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에게 맞는 시간을 찾을 때, 시간의 기쁨은 더 커진다.



모든 것에 시간을 잘 맞추면 즐거울 수 있는 게 베이킹이었습니다. 강박은 되려 정확한 강박으로 맞서는 것도 좋다 생각해요. 시간 지키는 것에 다리를 구르는 성격인 사람에게 '시간에 자유로워지세요.'라고 백날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어차피 다리 구를 건데. 그렇지만 베이킹을 하면서 오븐에 있는 타이머와 따로 있는 쿠킹 타이머가 저를 도와줄 것이고 이 시간을 잘 지켰을 때 나오는 결과물은 황홀하기도 합니다. 뭔가 내 시간 강박의 산물이 이렇게나 달고 이렇게나 남들에게 환영받는 경험을 할 수도 있죠. 레시피에 나온 시간 지키기라면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으니까요. 더불어 우리 집 오븐이나 온도에 따른 환경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내가 조절할 때, 그때의 기쁨은 또 남다릅니다.



그렇지만 스콘은 설렁설렁 만드는 게 포인트다. 이것이 스콘의 매력이다.



물론 복잡한 베이킹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스콘이나 브라우니 마들렌 정도의 간단한 베이킹을 합니다. 밀가루에 올바른 시간을 적용하면 그것들이 결과물로 나오는 것을 즐기는 정도입니다.  마치 '단추로 끓인 수프'동화책과 같은 이야기지만 베이킹은, 더 나아가 요리라는 게 재료에게 올바른 시간을 적용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의 강박은 있지만 적용은 예민하게 잘하니 얼마나 최적화되어있나 라고 기뻐할 만한 일인 것입니다.


 

예열을 하고 그 시간에 달걀물을 발라준다. 시간에 맞추는 두근거림이 있다.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를 만날 때는 시간에 대한 긴장이 많이 느슨한 편입니다. 종종 제가 늦기도 하고 이 친구가 늦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좋은 것은 한남대교 위에 차가 막히기 시작할 때 십여분 늦을 거 같다 연락을 하면 한 시간은 늦어도 되는 본인의 상태를 들려줍니다. 가령, 근처 미술관에 들어와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라든지 살 것이 있어서 어디에서 쇼핑 중이니 염려 말라 해 줍니다. 반대로 그 친구가 늦는 날에는 커피 쿠폰으로 먼저 차를 마시며 노래를 듣거나 혼자서 가보고 싶었던 곳을 산책하거나 합니다. 만나서 호들갑스럽게 입으로 미안해하지 않고 기다려준 것을 서로 감사해하며 기다리며 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죠. 면접 시간, 시험 시간에 늦는 것은 낭패스럽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약속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친구를 기다리게 한 날에는 그 미안함이 괴로움으로 오진 않았어요. 빵을 구울 때도 그렇습니다. 오븐의 시간은 정확하게 알아서 흘러가 줄테고 그 앞에서 동동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 시간에 더운물로 버터가 묻은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주변을 정돈하고 빵을 담을 예쁜 그릇을 내어놓으면 빵은 알맞은 온도에 알맞게 구워집니다.



오븐 열기와 버터 향기는 집을 따뜻하게 해 준다. 이래서 추운 날 베이킹은 좋다.



시간 강박은 많이 보드라워졌습니다. 모든 걸음이 바쁜 저에게 늘 '천천히 해도 괜찮아. 아직 여유 있어.'라고 이야기해주는 느긋한 남편과 십 년을 살다 보니 느긋함을 좀 배운 듯합니다. 늦어도 즐겁게 기다려주는 친구에게도 많이 배웠습니다. 물론, 기차와 비행기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고 살다 보면 제 노력과는 다르게 늦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조금 더 용기가 있다면 기차 시간 10분 전에 기차역에 도착하거나 시험 종료 5분 전에 답안지를 교체해보고 싶다는 묘한 바람도 있지만 그것은 생각만 해도 무릎 뒤가 당기듯이 불안해지므로 한 번씩 상상만 해보기로 했습니다.


지금 열차가 어느 역에 있는지, 버스는 몇 정류장 전인지, 지금쯤은 출발했어야 한다며 시계가 가는 것을 스릴 넘치게 바라보는 것은 이제 그만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늦지 않을 거예요. 알맞은 시간에 알맞게 구워 나오는 스콘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빵을 구워봅시다.



바삐 시계를 바라보는 당신에게 마음이 내달리지 않는 스콘 굽는 시간이길 바란다.






달달한 옥수수 스콘을 만들어 보자.



재료

중력분 260g

옥수수가루 50g

소금 2g

설탕 60g

베이킹파우더 7g

캔 옥수수 120g (캔 옥수수는 끓인 뜨거운 물로 헹궈서 체에 밭쳐서 물기를 제거한다.)

바닐라오일 3g

버터 50g

달걀 1개

생크림(또는 우유) 130g(65g)


1. 중력분, 소금, 설탕, 베이킹파우더를 체에 내려 뭉치지 않은 상태로 만든다.

2. 차가운 버터를 콩알만 한 크기로 잘게 자른다.

3. 차가운 달걀을 넣고 포크로 살살 섞어준다.

4. 생크림을 두 번 나누어 섞은 뒤 바닐라 오일을 넣고 섞는다. (포크로 계속 섞어준다)

5. 물기를 제거한 옥수수를 넣고 섞어 준다.

6. 반죽은 단단히 뭉치는 게 아니라 푸슬푸슬 대강 덩어리들이 질 때까지만 한다. (손으로 주무르지 않는다.)

7. 반죽을 두 덩어리로 나누고 두께 2~3cm, 15cm원으로 만들어 준다. (약 360g 두 덩어리가 나온다. )

8. 반죽을 비닐에 넣고 빠르게 모양만 잡아 준다. (원이 아니어도 좋다. 사각도 괜찮다.)

9. 30~40분 냉장고에서 휴지 한다.

10. 휴지 후 꺼내서 6등분 한다. (너무 크면 속까지 구워지기 힘들다.4등분 이상은 한다.)

11. 팬에 담고 표면에 달걀물을 발라준다. (달걀노른자와 생크림을 1:1 비율로)

12. 오븐은 180도로 예열한다.

13. 20~25분 구워준 뒤 식힘망에서 한 김 식혀준다. (뜨거울 때 먹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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