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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ul 22. 2020

뭉근한 간장 냄새가 집에 내려앉는 오후

천천히 짓는 반찬, 알감자 조림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중학교 국어 시간, 교과서에 실렸던 '방망이 깎던 노인'은 지금도 그 삽화가 기억날 만큼 좋아하는 이야기다.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의 장인 정신에 대한 수필로 차 시간으로 재촉을 하던 필자에게 노인은 저렇게 말하며 시간과 정성을 들여 방망이를 깎았던 것이다. 76년 작품으로 잊혀가는 장인 정신과 빨리빨리 흘러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였다. 2020년, 원래는 원더 키디를 타고 날아야 했던 지금에는 방망이 깎던 노인을 돌아볼 여유조차(또는 그 방망이가 무언인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까지) 없어진 듯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유명한 셰프들이 나와 스타의 냉장고에 재료를 꺼내 15분 만에 음식을 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요리를 해 나가는 모습이 재미있었고 완성도를 나름 평가하며 맛을 상상해보는 즐거움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훌륭한 셰프들은 그 짧은 시간에 척척 음식을 해나갔고 시간이 촉박해지면 함께 다리를 구르기도 하였다. 15분의 시간은 누가 봐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음식의 완성도는 놀라웠다. 그리고 나는 한번 더 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도 15분 만에 저렇게 요리할 수 있어.?"


함께 티브이를 보던 남편은 그렇게 물었다. 저런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 궁금한 것일까, 15분이라는 시간 안에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이 궁금한 것일까. 물어보니 15분 안에 만들 수 있냐는 것이었다. 물론 15분 안에 가능한 음식이 있겠지. 라면 같은 거 말이야.라고 대답해줬다. 15분의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어야 하는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편에게 말했다. 찌개 하나 끓이려 해도 쪼그려 앉아 마늘부터 까야한다고!





일과 살림을 병행하던 시기에는 퇴근과 동시에 코트만 벗어놓고 싱크대 앞에 서는 게 일상이었다. 후다닥 밥을 안치고 후다닥 찌개를 끓이고 후다닥 무언가를 볶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은 해 먹지 않았다. 정말 모든 것은 후다닥 이루어졌다. 가장 많이 해먹은 것은 햄을 구워 먹거나 돈가스를 튀겨 먹거나 냉동식품 중 무언가를 데워 먹거나였다. 그것마저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허덕거렸다. 밑반찬과 햄 구이로는 무언가의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오래오래 끓여먹는 음식의 힘이 그리워져서 주말에는 대체로 천천히 끓이는 음식을 해 먹었지만 평일의 후다닥 식사는 혼만 쏙 빼놓고는 아무 힘도 되어주지 못했다. 저녁을 먹었습니다.라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다.


그러다 일을 줄이고 살림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천천히 하는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오래오래 끓인 미역국을 좋아하고 오래오래 끓인 닭볶음탕을 좋아한다. 어느 날은 콩조림을 하기도 하고 장조림을 하기도 했다. 오후에 해가 저물어갈 무렵부터 저녁밥을 준비하기 시작하면 그 여유로움이 좋았다. 같은 재료에 같은 메뉴여도 후다닥 해 먹는 것과 시간을 들인 반찬의 느낌은 달랐다. 뭔가 뜨듯함이 오래오래 머물러서 허기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여름 하면 감자다. 하지(夏至, 음력으로는 5월, 양력으로는 대개 6월 22일 무렵)가 되면 감자를 캐는데 그래서 하지감자인가 싶다. 두고두고 먹기 좋은 이 감자를, 특히 동글동글 귀여운 알감자를 조려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간장 양념이 속까지 베어 들어 차게 먹어도, 따뜻하게 먹어도 모두 다 맛있는 알감자 조림. 서서히 해야 하는 이 반찬은 여름에, 가스불에 작은 집이 금방 후끈해지면 선풍기도 켜지 않은 채 천천히 천천히 간장을 졸이며 하는 맛이 있다. 시간과 정성이 감자 안으로 스며든다.


익어가는 게 감자인가, 나인가.




엊그제는 방에 앉아 아침부터 창을 열고 있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밥때가 되면 이웃집에서 풍겨오는 냄새들을 쉽게 느낄 수 있는데 밥때가 지난 오전 시간에 풍겨오는 음식 냄새는 조금 독보적이다. 깔끔한 오전 공기에 섞여있는 그 도드라진 간장 냄새. 그 냄새가 한참을 가는 거 보니 뭔가 간장을 달여서 무엇을 만들거나 아니면 장조림 같이 오래오래 익히는 음식인 듯했다. 점심이 될 때까지 세시간여 간장 냄새가 공기에 떠다녔다. 그 시간 동안을 가스불 앞에서 조심스럽게 음식을 들여다보았을 모습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재촉하지 않고 익어가는 감자, 끓을 만큼 끓고 나서야 그 맛이 짜지 않고 깊어지는 간장, 당신이 알고 있는 그 15분 뒤에 숨겨져 있는 이런 황금 같은 시간을 누리며 집 그득하게 달고 짠내를 채워본다. 역시 끓을만큼 끓어야 모든 것은 제대로 된 음식이 된다.


 




천천히 시간이 스미는 음식, 알감자 조림을 해보자.



재료

알감자 900g

간장 150ml

맛술 150ml

설탕 1.5T

올리고당 4.5T

물 3컵

양파 1/2개

파 1대

청양고추 2개(취향에 따라)


1. 감자는 껍질을 까지 않고 솔로 닦아주고 소금물에 한번 끓여 헹궈준다.

2. 넓은 팬에 올리고당을 제외한 재료들을 모두 다 넣는다.

3. 중간 불에서 천천히 끓여준다.

4. 물이 반쯤 줄어들면 채소를 건져내고 올리고당을 넣는다.

5. 나머지 물이 자작하게 졸아들 때까지 약한 불에서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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