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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죽의 도쿄 여행 6-1

천황과 막부 기묘한 관계에 대하여

by 넙죽

도쿠가와 막부의 흔적, 도쇼구


우에노 공원 한 켠에 신사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의 신사야 어느 지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것이지만 이 우에노 공원에 있는 신사는 다른 신사들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이 곳 도쿄가 현재의 도쿄가 될 수 있게 만든 한 인물과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까지 도쿄, 아니 당시의 에도는 그다지 정치, 경제적으로 주목받는 곳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는 천황과 귀족들이 거주하는 교토가 있는 간사이 지방이었고 에도가 있는 간토 지방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지방이었다. 그러나 지방의 다이묘들이 서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싸웠던 전국시대를 종결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곳 에도, 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세우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도쿄는 일본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곳 우에노 공원에 있는 도쇼구는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가문을 기리는 신사이다.

사실 이 곳이 일본의 다른 신사들보다 그 격이 높다는 것은 이름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보통의 신사가 진쟈라고 불리는 반면 이곳 도쇼구는 우리 말로 동조궁 그러니까 궁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일본의 신사 중에서 보통 궁의 칭고를 붙일 수 있는 것은 천황가와 관련된 신사가 대부분인데 천황이 아닌 인물을 모신 신사에 궁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은 일본인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가문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도쇼구에 가면 사당건물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천황가의 신궁도 아닌 막부의 수장과 그 가문을 위한 사당에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권력의 정점은 천황인데 어찌하여 천황가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대우를 받는 가문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질문의 해답은 일본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면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타국과는 고립되어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외세의 침략보다는 내부의 분열이었고 그 내부의 분열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권위가 필요했다. 그들이 찾은 권위는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천황가였고 일본에서의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서 권위와 권력을 모두 가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천황의 힘이 약해지고 신하의 힘이 강해질 때도 분명 존재했다. 다른 나라였다면 신하가 기존의 왕조를 부수고 자신의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이 가능했겠지만 천황의 권위가 워낙 절대적인 나라였던 일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천황의 존재는 그대로 두되 신하는 별도의 정부를 세워 실제적인 권력만을 가지는 방식으로 권력구조가 편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막부인 것이다.

애초에 일본 혼슈 도호쿠 지방의 이민족들을 정벌하기 위한 관직이었던 쇼군은 일본의 실제적인 권력기구인 막부의 수장이 되어 일본의 실권을 쥐었고 무릇 야심이 넘치는 사내들은 권위만 있고 권력은 없는 천황의 자리보다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되기를 바랐다. 때문에 막부는 미나모토 가문의 가마쿠라 막부, 아시카가 가문의 무로마치 막부,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 등으로 교체되었지만 천황가 만큼은 왕조의 교체가 없는 만세일계의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막부와 천황가 간의 기묘한 공생관계가 현재 우리가 보는 도쇼구(동조궁)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한 배경이었다.

근대화의 소용돌이에서의 천황


그러나 이 기묘한 공생관계는 에도 막부 말기에 점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흑선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인하여 일본에는 혼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내에서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에도 막부는 서양세력의 우수한 화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막부가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조슈와 사쓰마 등의 지방 정부들은 천황을 받든다는 명분 아래 막부의 몰락을 재촉했다. 빠른 근대화에 성공한 이들 지방정부들의 맹공에 막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고 조슈와 사쓰마의 개혁세력들은 메이지 천황을 옹립하여 신정부를 세운다. 그 후 그들이 추진한 것이 그 유명한 메이지 유신이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급격한 근대화로 인하여 부강해졌고 메이지 천황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칭송받게 되었다. 때문에 현재 도쿄에서 그것도 신주쿠나 시부야 등 번화가들이 즐비한 지가가 높은 지역에, 그것도 꽤나 넓은 부지에 그들 기리는 신궁이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메이지 신궁은 그 입구인 도리이에서부터 한참을 걸어들어가야 본당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매우 큰 신궁이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한 도쿄의 중심가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많은 경제적인 이익이 따른다하더라도 이 곳은 개발하지 않은 일종의 신성불가침의 공간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신궁의 중심에 다다르자 나는 이 곳에서 겉만 화려할 뿐 속은 빈 강정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메이지 천황을 갖가지 미사여구 등으로 칭송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것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랬다. 천황을 받다는 명분은 정말 명분 뿐이었고 막부의 몰락 이후 권력을 잡은 것은 메이지 천황이 아닌 결국엔 조슈와 사쓰마의 무사들이었다. 막부에서 조슈와 사쓰마의 유신지사들로 권력이 이양되었을 뿐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천황은 일본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셈이다.


천황이 사는 공간, 고쿄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천황의 위치가 중요했듯이 현대 일본에서도 천황은 많은 일본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실권은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가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일본 국민들에게 천황가가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 특히 아직까지 전세계가 사용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점을 기준으로 한 서력 대신 천황의 재위 기간에 따른 연호를 더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만을 보아도 그렇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70년대, 80년대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 반해 일본 인들은 히로히토천황의 시대, 쇼와 시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천황의 존재가 일본인들의 생활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일본의 천황이 살고 있는 황거, 고쿄는 도쿄에서 꽤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일본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라고는 하나 사실 막상 가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곳이다. 천황가의 일원들이 사는 고쿄 안쪽으로는 특별히 투어를 신청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게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고쿄의 입구 역할을 하는 니쥬바시 정도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그나마 관광을 할 수 있는 곳은 고쿄의 동쪽 정원인 히가시 교엔 정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곳을 방문한 이유는 이 곳이 일본 역사의 격변기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현재 천황의 거주 공간으로 사용되는 곳이지만 그 전에는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거주하던 에도 성이었다. 나는 사실 도쿄에 방문하기 전에 에도 막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어도 찾을 수 없었는데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던 에도 성이 일본 황실의 거주 공간이 되었는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막부의 중심지였던 에도성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가의 거주 공간이 되다니 메이지 유신의 결과를 이토록 잘 보여주는 공간이 어디있을까. 그러나 그 것은 역시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었고 천황은 교토에서 도쿄로 그 자리를 옮겼을 뿐 현실의 권력과 먼 존재라는 점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천황가의 권위는 존중하고 그들을 존경하나 그들이 현실 세계로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 그 이중성을 외국인인 우리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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