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이 오래된 역사 도시 안에 또 하나의 국가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국가는 작은 도시 또는 대도시의 한 구역에 지나지 않은 작은 면적을 가지고 있지만 오래도록 전 세계의 가톨릭 신도들로부터 성지로 추앙받아왔다. 바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거처하는 바티칸 시국이다.
그리고 그 바티칸 시국에서 가장 대표적이고도 상징적인 곳이 바로 산 피에트로 성당, 다른 말로는 성 베드로 성당이라고도 한다. 이 성당에서는 가톨릭 교회와 교황과 관련한 상징들을 만나볼 수 있어서 전 세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나 또한 마르코라는 세례명을 받은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부로 향하는 길이 매우 기대되었다.
성 베드로 성당
보통 성당의 이름은 그 도시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다. 바티칸 시국의 대성당이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딴 것은 바로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가톨릭 교회의 초기 수장으로 가톨릭 교회를 성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사도 베드로의 동상 역시나 손에 열쇠를 쥐고 있다
사도 베드로의 모습은 성당 내부 중심부에 위치한 그의 동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성당 앞 광장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인 쿠폴라에 올라보면 광장을 둘러싼 열주들이 열쇠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쇠 모양으로 열주들이 놓이게 된 것은 열쇠가 바로 사도 베드로를 상징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 이는 어떤 이를 천국으로 보낼지를 정하는 결정권을 의미한다. 때때로 사도 베드로나 교황을 상징하는 조각이나 문장에서 거꾸로 된 모습으로 등장하고는 하는데 사도 베드로가 순교할 때 거꾸로 매달려서 죽었기 때문이란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기 전 어부였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손에 끼는 반지를 어부의 반지라고 부른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
사도 베드로의 공식 후계자인 교황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양 세계를 대표하는 권위가 부재한 상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세속권력은 수많은 영지의 영주들과 왕들에게로 분산되었지만 종교적 권위만큼은 교황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교황의 또 다른 면모, 세속 군주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동시에 바티칸이라는 교황령의 대표자이다. 지금이야 교황이 현재 가진 종교적인 권위에 비하여 세속적인 권력은 미미한 수준이긴 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교황이 가진 세속 권력은 다른 영주들과 견주어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교황령의 시초는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가 이탈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그 땅의 일부를 교황에게 헌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샤를마뉴는 그 대가인지는 몰라도 서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때 이후 교황은 다른 세속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도시나 영지들을 자신의 봉신으로 삼기도 하면서 그 세력을 키웠다. 마키아벨리가 저술한 군주론의 모델로 유명한 세자르 보르지아도 바로 아버지였던 교황 알렉산드르 6세(로드리고 보르지아)가 가진 권위와 교황령의 군대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넘볼 정도였다. 그만큼 교황의 자리는 매혹적인 것이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종교적 권위와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특히 교황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파문이었다. 파문은 영어로 '엑스커뮤니케이션(Excommunication)'이라고 하는데, 교황이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특정인에게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렇게 가혹한 처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파문을 받으면 경제적인 거래나 사회적인 관계가 박탈된다. 사회적으로 매장된다는 의미이다. 일반인에게도 파문은 가혹하지만 중세의 영주들이나 왕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파문을 당하면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어 신하들의 반란을 직면하거나 암살까지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교황은 중세의 세속 영주나 국왕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용서를 받기 위해 추운 겨울날 카노사 성 밖에서 용서를 빈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은 당시 교황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 지를 상징한다.
천사의 성, 산탄젤로
그러나 이런 교황의 전성기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교황은 종교적 수장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유럽의 정치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다가 어느새 강력하게 성장한 세속 권력들에게 저지를 당하고 만다. 교황 클레멘스 7세 때 일어났던 로마 약탈은 종교적인 권위라는 무형의 힘이 적용되던 이른바 낭만의 시대가 종말 했음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아울러 신대륙까지 지배하는 왕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프랑스 왕의 편을 들며 자신을 견제했던 교황에게 보복하기 위해 교황령인 로마로 진격했고 로마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교황의 피신처였던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해 화를 면했지만 그를 지키던 스위스 근위대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충절을 기려서 이 시기부터 스위스 근위대만이 교황의 호위를 맡게 된다. 로마 약탈은 종교개혁 이후 흔들리던 교황의 권위와 권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사건이었다.
바티칸의 상징 중 하나인 스위스 근위병
당시 교황이 피신했던 산탄젤로성은 아직도 잘 보존되어서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성 베드로 성당 등이 있는 바티칸에서 일직선 방향으로 걸어가면 바로 만날 수 있는데 교황의 피신처의 역할을 했던 성이었던 만큼 성벽이 매우 두터운 성이었다. 교황의 안전을 위해 산탄젤로성과 바티칸까지 이어지는 비밀통로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산탄젤로성은 로마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무덤으로 지어졌지만 수차례 개축한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성천사의 성이란 뜻의 산탄젤로성은 로마 약탈 당시 교황의 안위는 지켰지만 교황의 권위까지는 지키지 못한 것 같다.
산탄젤로 성은 원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였다
프란체스코 교황 성하를 알현하다
현재 교황인 프란체스코 성하는 자애로운 성품으로 가톨릭 신자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신도인 나의 입장에서도 꼭 한번 알현하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었기에 교황 성하가 머무는 바티칸에 방문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 베드로 성당 근처에 다다를 무렵 수많은 인파를 보면서 살짝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슬쩍 앞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미국인 관광객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이 줄이 교황 성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냐고.
그런데 아주 재치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교황 성하를 만나기 위한 줄(Not for Meeting him)은 아니고 그를 멀리서 보기 위한 줄(Line for Audience)이라고. 사실 이 수많은 인파를 둘러보면 교황 성하를 가까이서 만난 다기보다는 멀리서 그림자라도 엿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한참을 기다려서 성 베드로 성당 부근에 이르긴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손에 초대장 같은 것을 들고 있어서 당황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초대장이 없으면 못 들어가나 싶어서 망연자실하던 찰나에 사제복을 입고 지나가시던 신부님 한 분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래도 그동안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생긴 '넉살'이란 것이 있어서 염치 불고하고 신부님께 말을 걸었다. "신부님(Father), 혹시 초대장을 받을 수 없을까요?" 신부님은 하얀 미소로 화답하시며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보시더니 내가 고대하면 초대장을 주셨다. 역시 구하면 얻어진다고 했던가. 초대장을 가지고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교황 성하를 기다렸다. 얼마 뒤 교황님의 의복과 같은 색인 흰색 차량 위로 교황님의 모습이 모였다. 수많은 인파들이 "파파 프란체스코!"를 외쳤고 교황님은 어린아이들을 안아주거나 축복해주곤 하셨다. 인파들 중에는 유독 남미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프란체스코 교황님의 고향이 아르헨티나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와 아내 모두 세례를 받은 신자이고 이제 막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신혼여행 중 교황님을 실제로 알현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축복을 받은 것 같아서 매우 행복한 날이었던 것 같다.
쿠폴라로 가는 길은 힘들어!
성 베드로 성당의 백미는 역시나 쿠폴라였지만 쿠폴라로 올라가는 길은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단 쿠폴라까지 가는 데에는 수많은 계단들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두가지 방안이 존재했다. 우선 처음부터 계단을 올라가는 방법이 있었고 중간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서 계단을 올라가는 방법이 있었다. 적당히 토실토실한 체형과 극한의 게으름을 가지고 있는 나는 조금이라도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선택에는 아내도 의심할 여지 없이 동의할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매우 많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힘을 들여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를 타는 시간은 매우 짧았고 그 때부터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평소에 운동을 조금 더 많이 해둘 것이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열심히 운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부질 없는 후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땀을 흘리며 올라간 쿠폴라에서 나는 베드로 성당의 열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아주 심한 고소공포증이 있기 때문에 그 감동은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힘들게 올라온 것이 매우 아까워서 최대한 오래 바티칸의 풍경을 눈에 담아두려고 했다. 두번 올라오기는 싫었으니까.
바티칸의 한국 수녀님
세례는 받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성당에는 자주 가보지 못하는 성실하지 못한 신자이지만, 가톨릭의 성지인 바티칸에 발들 디뎠으니 묵주라도 하나 구입하고 싶어서 아내와 함께 무엇을 사는 것이 좋을까 고민을 하면서 성물가게 안에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우리를 보던 수녀 한분이 "한국 분들이 오시면 이 묵주를 많이 좋아하세요."라며 정답게 말을 걸어주셨다. 그것도 우리말로! 바티칸에서 우리나라 수녀님을 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매우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혼 전에 열심히 다녔던 성당의 신부님도 바티칸에서 10년 동안 계셨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국 땅에서 같은 한국사람들 만나도 반가운데 수녀님을 만나다니 더 기뻤다. 다만 우리나라 수녀님이 권해주신 묵주 보다는 이탈리아 수녀님이 판매하시는 묵주 쪽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권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실 상업적인 목적의 판매가 아니므로 어느 수녀님에 구입해도 무방했지만 그래도 묘하게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