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리소르멘토
고대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는 이렇다 할 통일 국가가 등장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 영향력 있는 각 지역의 도시국가들이 주변 소도시들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남부에서는 이렇다 할 세력이 등장하지 않아 이슬람, 노르만, 스페인 등 여러 외국 세력들에게 번갈아 지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은 르네상스와 더불어 번성을 누려왔으나 곧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알프스 이북의 왕국들에게 압박 또는 침략을 받게 되어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은 혼돈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지금처럼 이탈리아가 분열된 상태로는 외세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일치감치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켜 절대왕정의 시대에 접어들고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것에 비하면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비교적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너무나 눈부셨고 각 도시국가들이 각기 개성을 뽐내며 고르게 번성했기 때문에 통일이 더 늦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의 통일을 주도한 주역은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 왕가였다. 사보이 왕가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명재상인 카부르의 도움을 받아 점차 세력을 넓혔다. 이탈리아 통일의 성공 여부는 통일을 방해하는 외세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달렸었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사전 외교를 통해 프랑스의 개입을 막고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 북부를 차지하게 되어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이제 남은 것은 나폴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남부였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이탈리아 남부에 독립국가를 선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매우 드라마틱하게도 주세페 가리발디는 개인의 권력욕 보다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이탈리아 남부의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했고 이로 인하여 이탈리아는 통일을 이루게 된다. 이탈리아의 통일, 리소르멘토 운동의 완성이었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 앞에 가면 조국의 제단이라는 아주 웅장한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북부와 남부로, 수많은 도시국가로 나누어졌었던 이탈리아는 통일된 나라가 되었고 이탈리아인들은 통일 이탈리아라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조국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통일의 주역이었던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의 국부가 되어 이탈리아 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로마를 구성하는 7개의 언덕 중 가장 높은 언덕인 퀴리날레 언덕 위에는 퀴리날레 궁전이 있다. 본래 교황의 여름궁전으로 지어진 이 곳은 이탈리아 통일 이후 사보이 왕가의 궁전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겪은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퀴리날레 궁전을 보면 이탈리아의 통일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부의 사정은 조금 다른가 보다. 오래도록 다른 길을 걸어온 남부와 북부 간의 갈등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남부는 주로 외국의 왕가들의 지배를 받았었고 이탈리아의 북부는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또한 이 두 지역은 산업구조도 다른데 이탈리아 남부는 주로 농업이, 이탈리아의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했다.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 산업구조로 인하여 이탈리아 북부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반면 남부지역은 그에 비해 낙후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크게 보면 북부와 남부지역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지역들이 자신들의 색깔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조금만 이동해도 지역의 분위기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 꼭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같은 빛깔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 한다. 진정한 통일과 화합은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어도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조금씩 서로에게 녹아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시점은 유월로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지만 이탈리아의 태양은 너무도 강렬하여 나의 정수를 모두 태워먹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매우 현명한 나의 아내는 자신의 모자를 여행가방에 넣으면서 나에게도 모자를 가져갈 것을 권했지만 그저 답답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아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로마에서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조금 더 버텼다가는 두피 속까지 빨갛게 익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산탄젤로 성 앞에서 얼른 밀짚모자 하나를 10유로 샀다. 그런데 산탄젤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가게를 하나하나 더 지나갈수록 가격이 1유로씩 더 싸지는 것이 아닌가! 매우 속이 쓰렸지만 이것도 인생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쓰린 속을 달래갔는데 여행이 계속될수록, 로마에서 피렌체로, 베네치아로, 밀라노로 갈수록 1유로씩 더 싸져서 종극에는 3유로짜리 밀짚모자까지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10유로에 샀는데 3유로짜리 모자보다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다를 거라고 아내가 위로했지만 크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나의 두피를, 머리카락을 빨리 지킬 수 있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