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메디치 가문 연대기

은행가 집안에서 르네상스의 중심 가문이 되기까지

by 넙죽

메디치 가문에 대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 대해서 서술할 때 메디치 가문을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대표적인 가문이다. 금융업을 통해 성장한 이 가문은 본래 혈통적으로 고귀한 가문이 아니었으나 그들의 고귀한 행보로 인해 어느 유럽의 귀족 가문 못지않은 명문가가 되었다. 이 가문의 사업수완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교황청마저도 그들의 자금을 이들에게 맡길 정도였다. 사실 말이 금융업이었지만 당시에는 고리대금업에 가까운 사업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그들의 사업으로 쌓은 부를 아낌없이 그들이 사는 도시에 베풀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피렌체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단순한 고리대금업자 가문이 아닌 역사에 길이 남을 고귀한 가문으로 그 이름이 남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고귀한 자들 중에서 가장 눈부셨던 두 인물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문장2.jpg 메디치 가문의 문장
로렌초_성당.jpg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 로렌초 성당


피렌체의 국부, 코시모 메디치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코시모 메디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코시모 메디치는 매우 수완이 좋은 사업가의 기질을 타고났는데 사업적 감각이 매우 뛰어나서 메디치 가문 본연의 사업인 금융업의 외연을 크게 확장시킨다. 유럽 곳곳에 지점을 마련하여 교황청뿐만 아니라 여러 왕가들과 귀족들의 재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는 엄청나서 마치 현대의 대기업의 총수와 그 위세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코시모.jpg


하지만 코시모 메디치는 이러한 부를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렌체 시민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특히나 그가 주목한 것은 학문과 예술 분야였다. 그는 피렌체의 학자와 예술가들을 지속적으로 후원하여 그 문화적인 혜택이 시민들에게 돌아가게끔 하였다.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도 이 시기 메디치 가문의 지원이 없었다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오_두오모.jpg


코시모 데 메디치가 학문과 예술 분야를 후원한 것은 자칫 가톨릭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돈놀이'로 재물을 쌓아 올린 원죄를 사회에서 고귀하다고 평가받는 학문과 예술분야에 투자함으로써 속죄받으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공공장소에 전시할 예술 작품과 우아한 건축물 그리고 역사에 남을 위대한 저술 등을 후원함으로써 시민들에게 메디치 가문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효과도 함께 누렸다. 게다가 재력가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공공 분야에 투자하는 이러한 모습은 고대 로마시대 때 관습처럼 이루어졌던 일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다. 피렌체에 위대했던 로마 제국의 시절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 모습이었을 테니까.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술라가 터를 잡고 그 유명한 카이사르가 성공적으로 건설한 피렌체는 점차 로마만큼이나 위대한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리카르디.jpg 메디치 가문의 궁전이었던 리카르디 궁전
중정.jpg 궁전의 중정
정원.jpg 아름답기로 유명한 궁전의 정원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 로렌초 메디치


로렌초 메디치는 앞서 언급한 코시모 메디치의 손자이자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피렌체의 문화 발전을 후원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미켈란젤로였다.


미켈.jpg 미켈란젤로 광장의 다비드상
전경.jpg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본 피렌체의 전경

로렌초 메디치는 예술적 감각 외에도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냈다. 로렌초 메디치가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메디치 가문의 독주에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그가 암살될 뻔한 위기가 한번 있었다. 다행히 로렌초 메디치는 무사했고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해 반란군을 진압함과 동시에 반란군을 배후에서 지원한 로마 교황청과 나폴리 왕국을 외교적인 수단으로 압박함으로써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에 대한 추가적인 위협을 막았다.


또한 메디치 가문의 위상과 재력을 이용하여 군사력이 별 볼 일 없는 피렌체를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냈다. 피렌체 내부적으로도 메디치 가문의 독재를 이룩하는 모습을 보여 이때부터 메디치 가는 금융 가문이라기보다는 귀족 가문이나 군주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메디치 가문이 유럽의 명문가문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로렌초 메디치는 피렌 체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일 마니피코' 즉, 위대한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위대한_로렌초.jpg


하지만 로렌초 메디치 시대가 전성기라는 것은 곧 이때 이후 메디치 가문의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치와 예술 분야에서 너무나도 위대했던 로렌초는 가문의 본업인 금융업에는 소홀했던지 메디치 가문의 재력이 줄어들고 파산의 위기에 빠지기도 한다. 그의 사후 메디치 가문 그리고 피렌체의 앞날도 그다지 밝지 못했다.


메디치 가문의 두 교황


로렌초 메디치 사후 메디치 가문의 영광은 성직에서 드러나게 된다. 로렌초 메디치의 차남인 지오반니가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한 것이다. 당시 유력 귀족 가문에서는 장자는 가문의 사업이나 영지를 물려받고 차남은 성직자가 되어 성직에서 가문의 영광을 빛내는 것이 거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레오 10세의 치세가 되고 여타 교황들이 그러하듯 그도 자신의 가문의 남자들을 추기경으로 삼아 가문의 세력을 키워갔다. 그중에는 차기 교황이 되는 클레멘스 7세도 끼어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메디치 가문 특유의 교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피렌체에 이어 로마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재정에 대한 판단은 명확하지 않았던지 교황청의 재정이 고갈시키는 사태를 불러오기도 했다. 때문에 성 베드로 성당의 건립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돈으로 천국의 문을 살 수 있다는 이른바 '면죄부'를 판매하게 되고 그 폐해가 가장 크게 드러났던 독일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레오 10세 사후 하드리아노 6세를 거쳐 교황이 된 클레멘스 7세는 '일 마니피코' 로렌초 메디치의 조카인 줄리오 메디치였고 사촌이었던 교황 레오 10세를 보좌하며 성직에서 자신의 경력을 착실히 쌓아갔다. 하지만 사촌인 레오 10세와 마찬가지로 이 메디치 교황의 앞날도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나 외부적인 요인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사촌이자 전임 교황이었던 레오 10세가 촉발시킨 종교개혁은 빠르게 확산되어 유럽 국가들의 상당수가 가톨릭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특히 표면적으로는 헨리 8세 자신의 이혼에 대한 승인 거부이기는 했지만 교황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던 영국 왕실의 이탈은 뼈아팠다.


또한 유럽의 두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클레멘스 7세의 외교정책은 실패했고 클레멘스 7세의 이러한 행보는 당시 파비아 전투에서 경쟁자 프랑스를 격파하고 유럽의 지배자가 된 카를 5세의 심기를 크게 거슬렸다. 로마로 향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는 잔혹한 약탈행위를 통해 메디치 가문의 교황들이 일구어 낸 로마의 르네상스를 종식시켜버렸다.

keyword
이전 05화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꽃 피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