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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도시를 만나러 간다, 로마

로마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가

by 넙죽

로마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가 처음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만나는 도시이자, 현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수천년간 고대 서양세계의 중심인 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로마의 훌륭한 도로 시스템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수도 로마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다.'라는 의미로 다가왔었다. 수천년동안 서양세계의 중심이었고 현재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이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국가들이 서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할 만큼 로마는 강성했으며 서양 세계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상징 같은 국가였다.


로물루스.jpg 로마 건국신화의 인물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하지만 세계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로마는 처음에 아주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늑대젖을 먹으며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서 시작된 이탈리아 중부의 아주 작은 도시는 끝없는 팽창을 거듭한 결과,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에 인접한 지역을 모두 정복하여 그 넓은 지중해를 그들의 호수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로마를 위대한 제국으로 만들었는가.


포로로마노.jpg 로마제국의 중심, 포로로마노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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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을 찾으려면 로마의 포로 로마노를 방문해야 한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들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다. 포로 로마노를 채우는 가장 많은 건축물들은 바로 신전이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고 사람들의 삶에서 종교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종교는 단순히 개인의 길흉화복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관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회의 안정화라던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전쓰.jpg 포로 로마노에 남아있는 수많은 신전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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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보고싶었던 건물은 수많은 신전들을 뚫고 지나가야 만날 수 있는 비교적 평범한 건물이다. 하지만 이 건물의 가치는 평범하지 않다. 이 건물의 이름은 '큐리아.' 로마 제국의 원로원이다. 원로원은 지금 현대 사회의 국회에 비견되는 정치기구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의원들이 국정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공간이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국회와의 차이는 의원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라 각 유력집안의 수장이거나 그 후계자들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로마를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으로만 기억하고는 하지만 로마가 폭발적으로 팽창한 시기는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 사이에서 선출된 집정관들이 로마를 다스리는 이른바, 공화정 시대였다. 로마는 처음 건국될 때는 왕정이었지만 점점 도시의 규모가 커지면서 각 유력가문들의 합의체인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원로원.jpg 로마의 원로원, 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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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흥망은 바로 이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원로원의 의원들은 젊은 시절 로마사회의 엘리트들로 당시에도 사회적인 책무로 여겨지는 병역을 경험하면서 군대 경험을 쌓고 여러 공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는다. 단순히 혈통만으로 의원이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경력을 쌓으며 실력을 인정받은 그들은 국가가 위급할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던지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는 했기 때문에 로마는 여러 위기에도 꾸준히 팽창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공화정의 위기 그리고 카이사르의 등장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듯 했던 공화정 체제도 새로운 변화 앞에서 위기를 맞았다. 폭발적으로 넓어진 로마의 영토는 넓어진 영토 만큼 수많은 군사 안보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로마의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군사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했는데 토론과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원로원의 방식은 맞지 않았다. 곧 군사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현지의 사령관들에게 많은 전권이 부여되게 되었고 그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카이사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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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가문이었던 율리우스 가문 출신인 그는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를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졌다. 연이은 군사적인 성공으로 민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된 카이사르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되었고 로마는 카이사르 1인에 의한 독재체재로 흘러가는 듯 했다.


브루투스 너마저.jpg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화장터
로스트라.jpg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이 카이사르 사후 원로원 의원들을 견제하기 위해 연설했던 연단인 '로스트라'


그러나 카이사르의 독재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의 의원들은 원로원 건물에서 그를 암살함으로써 공화정 체제의 건재함을 알리려 했다. 로마의 황제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던 카이사르는 아이러니하게도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로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이미 공화정 체제에 적합하지 않게 너무 커버렸으며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을 자처하는 인물들이 연달아 등장함으로써 로마는 급속하게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jpg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가 된 아우구스투스


로마의 황제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카이사르 이후 그의 후계자들을 자처한 사람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군사적인 재능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황제는 궁궐안에서 온갖 부귀를 누리며 군림하는 중국의 황제이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로마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안보 책임자에 가까웠다. 때문에 군사적인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은 황제들은 이를 극복할 만 한 다른 성과가 있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쉽게 말하면 살아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암살당하거나였다. 때문에 군사적인 재능이 없었던 로마의 황제들은 포로 로마노 근처에 위치한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황궁에서 호사를 누리기 보다는 국정에 대한 고민으로 고뇌에 빠지거나 암살당할 위협에 불안해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군사적인 성과를 꾸준히 자주 대중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jpg 황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팔라티노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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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로마노 근처에는 비교적 많은 개선문들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이 로마 황제들의 군사적인 업적을 기리기 위한 개선문들이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개선문 아래도 퍼레이드를 하며 자신들의 원정으로 얻은 전리품들과 노예들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건재함을 자랑했다. 승전한 지도자가 자신의 치적을 기리는 개선문을 세우고 그 아래를 행진하는 문화는 그 이후에도 유럽에서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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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과 더불어 황제들의 치적을 보여주기 좋은 곳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을 보면 현대의 스포츠 경기장이나 공연장과 유사한 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현대의 스포츠 경기장이나 공연장들이 콜로세움 등에서 그 디자인을 따왔기 때문이다. 이 콜로세움 안에서는 주로 검투사들간의 경기, 검투사와 맹수들과의 사투 등이 벌어지고는 했는데, 이들 검투사들과 이국의 맹수들은 주로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서 조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이국적인 외모의 검투사와 맹수들은 로마가 건재하다는 증거이며, 이는 황제가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때때로 콜로세움에서는 역대 황제들의 유명한 전투들이 재현되고는 했으며 콜로세움 안에 엄청난 양의 물을 채워 놓고 모의 해전까지 벌이고는 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콜로세움 안에서의 생동감 넘치는 재현 전투는 황제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돋보이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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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로마의 개방성


로마가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통치능력이나 군사력의 우수성 때문이지만 로마가 그토록 오랫동안 넓은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비결이 있다. 바로 로마 사회의 개방성이다. 당시 로마가 넓은 영토를 통치했음에도 통치에 어려움이 적었던 것은 정복한 국가의 시민들을 자신들의 내부로 적극적으로 끌여들였기 때문이다. 로마에는 해방노예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비록 전쟁에서 져서 노예가 되더라도 열심히 돈을 모아 몸값을 지불하면 자유의 몸인 해방노예가 될 수 있고 운과 능력만 있다면 관료가 되거나 자신의 아들 대에서는 로마의 지배층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로마는 정복지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다신교였던 로마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토착신들 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신들도 자신들의 품안에 받아들였다는 것이 놀랍다. 로마에 위치한 판테온은 그 거대한 규모에서도 놀라지만 그 이름의 의미에서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판테온이라는 이름 자체가 모든 신들의 신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로마 멸망 이후에는 기독교의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로마 시대 동안에는 로마 제국 내의 다양한 신들을 모시는 신전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피정복민들의 문화까지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로마의 개방성이 그들을 수천년의 제국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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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 1.jpg 로마 시내에 위치한 판테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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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 빛.jpg 판테온의 돔에서 쏟아지는 한줄기 빛은 신성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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