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던 삶에서 견디는 삶으로
견디는 삶이 되어버린 나의 서른
견디는 삶의 비중이 더 많아져 버렸다
스물여섯 살 때 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는 물에 대한 공포증이 너무 많아서 수영을 배우지 못했는데 직장을 가지고부터 무언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해방구를 찾다 보니 수영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회사 가는 길에 수영장이 있어서 퇴근하고 난 후 수영강습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물에 뜨는 것도 어렵고, 몸놀림도 허우적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물도 많이 먹고 강사한테 혼나는 것을 견디면서 한 달쯤 시간을 보냈을까. 어느덧 자유형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영에 재미가 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수영장에 연습을 하러 가고는 했는데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호흡이었다. 인간은 수중생물이 아니니 몸의 움직임은 물고기의 모습을 흉내 내더라도 호흡만은 어쩔 수 없이 물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 처음에 수영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도 바로 이 '호흡'이었다. 호흡은 필수불가결인 부분이었지만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에 호흡을 너무 자주 하게 되면 속도도 더뎌지고 자세도 흐트러지게 되었다. 물론 수영을 잘하는 이른바 '고수'님들은 그런 일이 없으시겠지만 운동에는 젬병인 나로서는 참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래도 두려움과 불안은 견디고 최대한 호흡을 길게 가져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래도 실력이 조금은 늘게 되었다. 나는 이 부분이 나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삶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 짓고 살고 있었다. 견디는 삶과 성취의 짧은 순간. 나에게 견디는 삶이란 성취를 위하여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는 삶이다. 학창 시절에는 수능과 모의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하여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고 20대 때에도 마찬가지로 학점이나 토익 점수,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순간이 견디는 삶이었다. 견디는 삶의 순간을 지나는 순간은 무척이나 괴롭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두렵지만 그 순간을 지나고 성취의 순간이 도래하면 그동안의 고생이 보상받는 그런 메커니즘 속에서 나는 살아왔던 것이다. 비록 성취의 순간이 주는 쾌감은 그동안의 고생에 비하면 짧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성취의 순간들이 쌓여 완전한 나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보다 더 나은 나.' '내가 꿈꾸던 삶을 위해 가기 위한 순간들.' 그리고 성취의 순간이 지나면 다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전까지 남들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당당하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목표를 위하여 미뤄왔던 것들을 말이다. 나는 그렇게 내 어린 시절들을 채워왔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른이 되고 삶이 어느 정도 안정궤도로 오른 이 시점에서는 성취보다는 그 성취까지 가기 위해 견디는 순간들이 더 많아졌다. 지금 나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성취라는 것들은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 또는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를 늘리는 것 정도로 보인다. 이런 목표들에 닿기 위해서는 앞으로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이라는 긴 순간이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이 목표들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를 위한 성취들이지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성취인가라는 부분도 확실하지가 않다. 물론 승진을 하면 월급도 늘 것이고 더 넓은 집에 사는 것 또한 매일의 쾌적한 삶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 하나를 얻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견뎌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괴롭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수월하게, 즐겁게 나의 삶을 견디기 위하여 작은 목표들을 설정하기 시작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어디는 꼭 가봐야지.' '이번 주에는 이 것을 꼭 먹어봐야지.'라는 비교적 원초적이고도 이루기 쉬운 목표를 단기간에 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이뤄질지 안 이뤄질지 불확실하지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중장기 목표로 세우기도 한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 중 하나는 내가 쓴 글을 책으로 엮어서 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소소하게 작은 목표로 여행을 다녀온 것을 글로 남겨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데 가끔 포털사이트에 자그마한 부분이라도 내 글이 소개되어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날이면 큰 성취감을 맛보기도 한다. 나의 서른은 어린 시절보다 큰 성취를 맛보기는 더 어렵고 또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도 쉽지 않아졌지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설정할 작은 자유가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행복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서른의 견디는 삶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