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곳
소련 시절 소련 정부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으로 크렘린이라는 단어를 많이 생각했다. 지금도 가끔 러시아 정부에 대한 뉴스를 다룰 때 '크렘린에서는....'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러시아에서 크렘린은 도시의 성채를 의미하는 일반 단어이지만 보통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의미한다. 러시아 역사에서 모스크바의 크렘린이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크렘린은 전통적으로 모스크바 공국시절부터 차르들의 공간이었고 모스크바가 소련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그 중요성이 더 커졌다. 지금도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러시아 정치의 중심지는 이곳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 처음 오면서 과연 이곳을 관람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사실 입장권만 구입하면 누구나 입장이 가능하다. 다만 다른 곳들보다 조금 더 검문이나 경비가 삼엄한 것은 사실이다
크렘린 안에 들어서자 대회궁전이 보인다. 과거 소련시절 공산당 전당대회 등이 열리기도 했다는 곳이다. 소련 시대에도 크렘린이 역사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면 상원 건물이 보인다. 과거 레닌의 집무실이 있기도 했던 곳로 역사의 현장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비교적 현대의 시간을 넘어 이제는 본격적으로 차르의 공간에 다가갈 차례다. 크렘린 안에는 차르의 권력을 상징하는 두 기물이 있다. 바로 차르의 대포와 차르의 종이다. 이 두 기물이 유명한 이유는 하나다. 매우 거대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거대함이 차르의 권력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용성은 없어보이지만 저 거대한 기물들을 만들 수 있는 재력과 조직력, 즉 권력을 가졌다는 증거이니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사실 크렘린 안에서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공간은 정교회 성당이 모여있는 중앙부분이다. 네다섯개의 성당이 일종의 군을 이루고 있다. 각 성당 별로 그 목적이 다른데 어떤 성당은 주교들의 성당, 또 어떤 성당은 차르의 가족 성당이라는 식이다.
크렘린에 중심지의 상당 부분이 정교회 성당으로 채워져있다는 사실에서 러시아의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보통은 한 두개의 성당이 존재할 뿐이지만 이 공간은 정교회 성당들로 꽉차있는 느낌이랄까. 차르 가문의 묘지 역할을 하는 대천사 성당에서 부터 황제들의 개인 예배당이었던 수태고지 성당이 눈에 띈다. 처음 러시아에 왔을 때 정교회 성당들이 모두 비슷해 보여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두달 살았더니 성당의 건물 장식이나 돔 모양들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각 성당의 돔에 칠해진 빛깔들과 돔의 숫자들이 그들을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만, 각 성당에 얽힌 이야기들도 성당들을 살아있게 하는 요소기도 하다. 성모의 성의를 보관하고 있다는 성모성의소장성당이나 이반 대제의 벨타워도 각자의 매력을 뽐낸다. 하지만 오히려 모두가 금빛의 화려한 돔을 뽐내는 가운데 비교적 소박하게 다른 성당들의 곁을 지키는 은빛 돔의 총주교 궁전(12사도 교회도 같은 건물안에 있다)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왜일까.
이 수많은 성당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곳은 차르의 대관식이 열렸단 성모승천 성당이다. 일단 그 웅장함과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성당은 여러개의 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당의 내부에는 화려한 장식과 프레스코화로 가득 차있었다. 비록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혹독한 모스크바의 추위와 칼바람에 몸서리치면서도 이 공간 안에 들어서자 잠시나마 평온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 영적 공간이 주는 편안함은 고요하고 참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