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게오르기의 용맹을 닮아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한번에 갈 수 있는 곳에 파르크 포베디가 있다. 꽤나 규모가 큰 공원이라 관심이 많이 가는 곳이었고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이 조금 지나가면 방문하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시내에 나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항상 눈에 덮여있는 모습을 보아왔는데 눈에 덮여있어 제모습을 다 들어내지 못하는 와중에도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뼛속까지 한기가 드는 러시아의 추위와 칼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걷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차일 피일 방문을 미루던 곳이었다.
파르크 포베디라는 이름을 직역하면 승리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어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곳인지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공원에 직접 방문해보니 이 공원이 기리는 승리가 어느 곳에서 이루어낸 것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2차세계대전이다.
러시아인들의 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얻어낸 2차세계대전의 승리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과 마찬가지로 서방세계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린 영광스러운 기억이다. 이때의 전쟁을 독소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당시의 러시아, 소련은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엄청난 젊은이들의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 승리했다. 피로 이루어낸 승리이기에 더 값지다고 여겨지는 것이겠지.
파크 포베디는 당시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호국 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호국 공원이라고는 하지만 근처 주민의 입장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 햇볕을 쬐며 멍때리기 좋은 공원이기도 하다. 탁트인 공원의 구조가 햇빛을 온전히 다 받아내고 있어 겨우내 혹독한 추위에 얼어버린 몸을 녹이는 데는 제격인 장소란 생각이 들었다.
파크 포베디에는 몇가지 상징물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인상 깊은 곳은 공원 중앙에 위치한 회랑들과 그 가운데를 차지한 거대한 오벨리스크다. 사진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크기이고 또 그 재질이 금속으로 되어 있어 더 굳센 인상이다. 본디 이집트 문명의 산물이었던 오벨리스크는 어느덧 유럽사회에서 위대한 성취를 기념하는 조형물로 자리잡게 된 것 같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은 구조물은 그것을 세운 자들의 자긍심의 크기일까.
그러나 나의 눈길을 한 눈에 사로잡은 것은 바로 성 게오르기의 동상이다. 역시나 이탈리아의 대리석 석상이나, 프랑스의 청동상보다 러시아의 동상은 투박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강한 힘이 느껴진다. 모스크바에서는 성 게오르기의 형상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아마 그가 모스크바의 수호성인이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말을 타고 창을 손에 쥔 기사의 모습으로 용을 제압하는 그의 모습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용살자인 지그프리트를 떠올리게 한다. 서방 세계에서의 용은 악을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용을 처단하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요, 용맹의 상징인 것이다. 그야말로 러시아의 호국의 상징이라고나 할까.다시 말해, 성 게오르기의 발 밑에서 고통받는 악룡은 나치 독일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공원 나들이에서 신화와 역사가 어우러진 모습을 마주치니 자뭇 가슴이 웅장해졌다. 위대한 승리의 기억이 자부심으로 남은 그들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동화되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