넙죽의 러시아 여행 - 블라디보스토크 4-2

러시아의 사나이는 시베리아로 간다

by 넙죽


시베리아 개척의 역사


미국에게 서부 개척의 역사가 있다면 러시아에게는 시베리아 개척의 역사가 있다. 미국의 카우보이들이 금을 찾아 황무지를 가로 질러 서부로 향했다면 러시아의 사나이들을 부동항 을 찾아, 목재와 모피를 찾아 눈과 얼음의 땅인 시베리아로 향했다. 사실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가치에 대하여 눈을 뜬 때는 제정 러시아 말기였다. 특히 시베리아 및 연해주를 개척하는 데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였다. 그는 시베리아의 잠재력에 일찍 눈을 떴고 동 시베리아 개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가 청나라와 체결한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은 러시아가 연해주 등 동시베리아 지역을 차지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공로로 그는 아무르스키 백작으로 봉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독수리 전망대로 향하는 언덕에 위치한 그의 석관과 동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없었을 것이다.

니콜라이 무라비요프의 동상과 그의 석관
그의 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목적 중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거나 구경하는 것이다.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다. 보통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거쳐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가고는 한단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 되게 된 이유는 이 곳이 러시아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어렵게 마련한 부동항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어는 것은 다른 항구들과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항구들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항구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스크바 등 서쪽의 대도시들과의 원활한 자원의 유통이 중요했다. 그러한 목적 하에 만들어진 것이 시베리아 횡단 철도였다. 미국도 서부 개척 후 동부와의 원활한 연계를 위하여 철도를 건설한 바 있다. 철도는 해당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는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한 지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물자의 유입이 필수적이다. 아마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다른 지역에 부동항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다른 곳에 건설되지 않았을까.

시베리아 철도의 시작이자 끝. 블라디보스토크 역
역사 내에 시베리아 철도를 달리던 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니콜라이 2세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시베리아 개척의 성패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사업이었기에 제정 러시아의 황실에서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니콜라이 2세는 황태자 시절 블라디보스토크에 방문하였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그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세워져 있다. 니콜라이 2세 스스로도 제위 시절 내내 제정 러시아의 극동 팽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황제였다. 특히 일본의 요동반도 진출을 견제하는 삼국간섭이 성공을 거두면서 일시적으로 그의 정책은 성공하는듯 보였으나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러시아의 극동으르의 팽창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더이상의 팽창이 멈춰진 것일 뿐 러시아의 극동 개척의 성과는 아직까지 유효하여 시베리아 지역이 러시아의 영토로 온전히 자리잡게 하였고 현재의 러시아가 있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황실의 몰락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던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게 되면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러시아의 황실이 무너지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은 요승 라스푸틴에 의한 국정 농단이었다. 러시아의 궁정에 갑자기 등장한 라스푸틴은 현란한 말솜씨로 황제와 황후를 사로잡는다. 라스푸틴이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혈우병을 앓고 있었던 황태자를 라스푸틴이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왕가들은 서로간의 정략 혼인이 많았는데 그 때문에 한 왕가가 가지고 있었던 유전병이었던 혈우병이 유럽 전역의 왕실에 퍼지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치료책을 알아보아도 상처가 나면 피가 잘 멈추지 않는 황태자의 혈우병에는 효험이 없었는데 라스푸틴이 등장하고 난 후부터는 약간의 효험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라스푸틴에게 자신의 말이라면 껌뻑 죽게된 황제와 황후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러나 그의 권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누군가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낱 요승의 말에 의해 국정을 움직인 황제와 황후도 황실의 몰락이라는 것으로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어쩌면 니콜라이 2세는 아들을 지극히 사랑한 아버지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한 사내아이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황제였다는 점이다. 사람은 그가 앉은 자리에 따라 잘못된 판단의 결과와 무게는 다르게 매겨지기 마련이다. 그가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20180319_093547.jpg 니콜라이 2세의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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