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떠나버린 나의 외할아버지
어렸을 적 외가에 대한 나의 기억의 대부분은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것이 많다. 내 기억에 외할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었다. 따로 물려받으신 재산도 없으셨고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그 분은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일구셨다. 외할아버지는 인생의 대부분을 땅에서 보내신 진정한 농군이셨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주로 포도 농사를 지으셨다고 한다. 포도를 재배하시고 버신 돈으로 조금씩 땅을 사시며 본인의 부를 일구셨다. 가장 전통적이고도 정직한 방법인 본인의 땀으로 땅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인생까지 알차게 일구신 분이셨다. 내가 기억하는 처음 외가의 모습은 작은 마당이 있고 주변에 작은 밭들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농가의 모습이었다. 집 자체는 작은 한옥집이었는데 집 한가운데 작은 대청 마루가 있어서 여름에는 가족들이 모여서 수박을 잘라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좋은 추억이 깃든 집이었지만 화장실이 푸세식이어서 유치원생이었던 내 입장에서는 용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가는 것이 매우 무섭고 불편해 외할아버지에게 징징대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한 이년 뒤에 외가는 근사한 이층집에 잔디 깔린 마당까지 딸린 근사한 양옥집으로 바뀌게 되었다. 평생 열심히 일군 재산으로 마련하신 집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마련한 마당에서 나와 동생은 마음껏 뛰어놀 생각에 매우 신이 났던 기억이 있다. 물론 당연히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에 대한 기대도 함께였다. 새로운 외갓집이 완공되는 날. 돼지머리를 올린 고사상에 절을 하며 앞으로 가족들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모두 빌었고 외할아버지는 그동안 고생한 인부분들과 동네분들에게 막걸리와 음식을 대접하셨다. 그때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나는 참 멋있게 느껴졌다. 자신의 삶을 잘 가꾼 사내의 등을 본 느낌이랄까. 외할아버지가 계시기에 나는 참 마음이 든든했었다.
연세가 드셔서 농사일을 그만두시게 된 외할아버지는 때때로 손주들을 보러 당신의 딸들의 집에 방문하고는 하셨다. 유치원이 끝나고 가방을 등에 달랑 달랑 메고 집에 오면 모시옷 차림에 밀짚모자를 손에 들고 안방에서 손주들을 기다리던 외할아버지가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얼굴이 넙죽했던 나를 넙죽이라고도 불러주시고 쭌쭌이라고도 불러주신 외할아버지는 나를 참 귀여워해주셨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네살 때쯤 외할아버지는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다니셨다는데 하루는 내가 외할아버지를 꼭 붙잡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나 보다. 그때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꼭 붙들어 쨔샤" 라고 말씀하시며 내 손으로 본인의 허리춤을 잡게 하셨다는데 그것이 어린 나에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세발자전거 뒤에 동생을 태우고 동생에게 외할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대로 "꼭 붙들어 쨔샤"를 외쳐댔단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나와 내 동생에게도 허허 웃으며 야단 한번 안치신 그런 나의 외할아버지셨다.
평생 농사를 지으셨던 외할아버지는 농사일의 고됨을 잊기 위해 술과 담배를 자주 하셨다. 농사일을 그만 두신 다음에도 술과 담배는 외할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놓지 못하셨다. 특히 나는 술에 취한 모습의 외할아버지가 기억이 많이 난다. 워낙 점잖은 분이셨던 터라 주사는 거의 없으셨지만 굳이 주사라고 할 것을 뽑는 다면 술의 힘을 빌어 본인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손주들에게 하시는 것이었다. 주로 손주들을 앞에 앉혀두고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부모님 말씀은 어떻게 잘 들어야 하는 지 등이었다. 다른 집들은 밥상머리 교육이었지만 우리 외가는 술상머리 교육 정도였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이 외할아버지의 사랑법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담배도 많이 좋아하셨는데 다른 어떤 선물 보다 담배 선물을 가장 좋아하셨다. 외할아버지의 건강을 해치는 담배를 선물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가족에게 항상 고민이 되는 문제였지만 외할아버지가 워낙 담배를 좋아하시기도 했고 평생 잔병치레도 없으셨던 강인한 분이셨기에 그 담배가 외할아버지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사랑했던 그 술과 담배가 우리에게서 외할아버지를 앗아갔다.
군에서 제대하고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한창 취업준비를 할 무렵.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전해진 소식은 외할아버지의 폐암 선고였다. 평생 사랑하신 술과 담배의 영향이었다. 그동안 외할아버지에게 술과 담배를 선물했던 것에 대한 강한 후회가 밀려왔다. 외할아버지의 투병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동안 각자의 일로 소원했던 외가 식구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가 조금 더 우리 곁에 오래 남아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그분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은 슬프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되어갔고 병마와 싸우는 외할아버지의 기력도 쇠해만 갔다. 당당한 풍채와 좋은 혈색을 가졌던 외할아버지는 어느새 깡마르고 혈색도 창백해지셨다. 외할아버지를 떠나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어린 시절 이후 한동안 잡아본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그의 체온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다. 외할아버지는 한번의 크고 힘겨운 숨을 내쉬시고는 우리들의 곁을 떠나셨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유년 시절이 내가 사랑한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다.
외할아버지가 떠나시면서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는 것은 그래도 그 분께 내가 작게나마 그분에 나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취업에 성공해 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나는 다니던 대학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무실에 연차를 내고 엄마와 서울에 올라왔다. 학사모를 쓰고 동기들과 엄마와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나는 외할아버지도 외숙모와 함께 치료를 위해 서울에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졸업의 기쁨을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나는 외할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친구들에게는 다음을 기약하고 엄마에게 빨리 외할아버지를 보러가자고 졸라댔다. 서둘러 병원에 도착한 뒤 만난 외할아버지는 치료 때문에 퍽 지치신 모습이었다. 외할아버지의 기력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드리고 싶어서 병원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갈비탕을 대접해드렸다. 손주가 회사에 다니며 탄 월급으로 소박한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많이 드시지도 못하셨음에도 매우 기뻐해주셨다.
외할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교감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의 이직에 성공했다는 말씀을 외할아버지께 올렸을 때 외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너무도 좋아하셨다. 내 손을 꼭 잡으시며 가문의 영광이라고 연신 말씀하셨다.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직업임에도 작은 성과임에도 좋아해주신 외할아버지 사랑이, 따뜻한 마음이 기억에 남는다. 그것이 나와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대화이자 교감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 가슴에 깊게 남아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이지만 가끔 버거울 때도 있고 일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순간도 당연히 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당연히 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가 이직했을 때 기뻐해주신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면서 버틴다. 그때의 외할아버지의 체온과 음성이 회상하면서 힘든 사회생활을 버텨간다. 마치 외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나를 바라보며 응원해주시는 상상을 하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나에게는 수호신인 것과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