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llup Lady
늦은 밤. 턱걸이를 하던 여자의 이름은 혜선이었다. 김혜선.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서른 살은 적지 않은 나이. 10대의 낭만도 20대의 꿈과 열정도 사그라버린, 지독히 현실적이게 세상을 보이는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친구들 중에는 결혼을 한 친구도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아니 그녀에게 결혼이란 사치일뿐이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멋진 결혼을 꿈꿨던 적도 있었다. 갓 대학을 입학했던 스무살 때였을까. 아님 캠퍼스에서 비누 향이 날 것 같이 말끔하게 생긴 멋진 남자 선배를 봤을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감당치 못한 빚에 허덕이기 전이었을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혜선에게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3월의 노오란 개나리가 가득했던 서울의 한 대학 캠퍼스.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대학 간 사람이 나왔다며 기뻐했던 아버지. 그리고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가야한다며 장학금이 약속된 지방 국립대 보다 서울의 사립 대학을 권유했던 엄마. 혜선은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래도 자식의 대학 입학을 기뻐해주는 부모의 환한 얼굴에서 행복을 느꼈다.
취업이 잘된다는 경영학을 전공했으니 이제 혜선의 앞날은 봄날의 햇살 처럼 따뜻하고 밝기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할 것 같은 나날은 5월의 벚꽃이 캠퍼스에 피어나기 전에 끝나버렸다. 봄날의 꽃이 아름답지만 찰나동안 그 꽃을 피우고 언제 그랬듯이 져버리듯이 그녀의 대학생활도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의 삶에서 대학생활을 앗아간 것은 너무나 사람이 좋았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굴지의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탄탄한 중견기업에 다녔던 혜선의 아버지는 가족의 좋은 울타리였다. 그러나 그의 단점은 정에 약하다는 점이었다. 사업이 힘들다는 대학 후배의 하소연에. 같이 기울인 소주 한 잔에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 후배의 보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주말 드라마에 등장하는 뻔한 결말처럼 아버지의 대학 후배는 사업이 망한 후 잠적해버렸고 그가 남긴 빚은 고스란히 혜선 가족의 것으로 남았다. 집에는 어느 새 다닥 다닥 붙은 빨간 차압 딱지가 가득했다. 가족의 삶에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낙인이 새겨졌다.
가족들에게 빚의 멍에를 씌운 것이 아버지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을까. 무너져버린 아버지는 어떻게든 빚을 해결하고자 회사일과 대리운전을 하다가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 회사에서 나온 퇴직금과 위로금으로 빚은 상당히 많이 정리되었지만 그래도 2억 가까운 빚이 남았다. 그리고 그 빚은 대학생인 혜선과 평생 전업주부로 산 그녀의 엄마에겐 너무 가혹했다.
그리고 그 빚을 정리하기 위해 혜선은 대학 생활을 정리하고 작은 회사의 경리 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졸 사원이 아닌 고졸 사원이 받는 월급이야 너무 뻔했기에 퇴근 후에도 돈을 벌기 위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마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고 했던 그의 아버지 처럼.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턱걸이를 시작했다. 턱걸이를 하기 위해 아둥 바둥하는 몸짓이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일까. 매일 매일 잘하지도 못하는 턱걸이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을 위로했다. 오늘도 잘 살아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