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eK Jul 14. 2023

"슬플 때 울지 않으면 몸이 대신 운다."

아구럴수도있겠당


마음을 만나는 일은 참 감동적입니다. 설사 그것이 울음의 형태라 할지라도 모든 올라오는 감정들이 참 소중합니다. 이는 내 마음이 곧 내가 아니라는 깨달음 이후에 더 강렬해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내 마음에 감정이 일면 그 감정과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이 아프고 괴로웠어요. 그런데 이제는 모든 감정들을 손님처럼 바라봅니다.

-김리사 작가님의 <살아가는 일은 울음을 터트리는 일> 발췌
https://brunch.co.kr/@yebbi2000/174


 나는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다. 좋은 건 몹시 좋아하고, 싫은 건 최선을 다해 싫은 사람. 까맣거나 하얗거나. 늘 답이 있고 명료한 내가 좋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뜨겁게 사는 동안 몸은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1년여 전, 처음 명상을 시작하고 나서 나를 바라보게 된 후였던 것 같다. '내가 이런 건 좋다고 느끼는구나.', '아 내가 이런 걸 힘들어했구나.' 그 경험을 축적하고 나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선택이구나. 좋은 것을 만드는 순간 싫은 것도 같이 생기는구나. 그 반복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공허하게 맴도는 말 같이 느껴지겠지만 이 사소한 깨달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얼마간 나를 더 힘들게 했는데, 그 이유는 매 순간 확신할 수 없고 오히려 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정말 그래?"하고 다시 묻게 했고 그 대답은 결국 언제나 "알 수 없다."로 끝났다.


 모든 순간, 모든 관계, 모든 상황에서 내가 빠르고 효율적으로 찾아 놓은 수많은 답들이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무기력해졌고 그러다 보니 반응을 최대한 줄이게 되었다. 화가 나는 상황은 잠시 그 자리를 피하고, 뭔가 말하고 싶다면 한번 더 생각했다.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그렇게 침묵한 채로 있어도 되는 것들이었다. 허탈하고도 처참했다. 올바른 삶은 이런 것이고 모든 것은 이래야만 해.라는 굳건한 신념 덩어리로 살아온 지난날들을 모두 부정해야만 했다. 실제로 그랬다.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 조차 오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필요했다. 


 대학 시절, 캠퍼스를 뛰쳐나와 야생에서 영화를 배우던 때에 나는 초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스물둘의 일이었는데, 극영화 한 편과, 다큐 한 편을 만들어 내야 했다. 다큐의 주제는 "Who am I"였다. 지겹고도 답답한 저 질문, 나는 왜 태어났으며 누구인지,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헤매고 살았던 터라 살면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내가 좋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내 선택이 점점 더 축적된 총합이 곧 나라고 내 생각을 믿었고, 그 생각이 맘에 들었던 것뿐이다. 그럴수록 나는 나에게 더 많이 실망하고 더 많이 요구해야만 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은 추켜세우고, 원하지 않는 모습은 뒤로 숨겼다. 나조차도 모르게. 그러면서 스스로와의 사이는 점점 더 틀어져만 갔다. 늘 혼을 내고 채찍질을 하며 좀 더 잘할 수 있다. 지금의 네 모습은 그저 과정일 뿐, 저 끝에 도달할 수 있다. 고 끝없이 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지금 나 그대로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 


 얼마 전 명상 선생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제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대화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말을 잇지 못하는 형태의 울음, 마치 울음을 집어삼킬 때 느껴지는 진동 같은 게 얼굴과 손의 저림으로 올라왔다. 아주 어릴 때 경험했던 울음 같은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큰 결심을 했다거나, 어떤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흘러가도록 두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아 슬프구나, 아 기쁘구나, 곧 이 감정들도 지나가는구나. 놀랍도록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냥 이 자체가 그냥 느껴지고 마는 그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걸리더라도 '아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하고 흘러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인스타에서 유세윤의 대문글이 눈에 밟힌다. 





"아구럴수도있겠당" 이라니



 그는 분명 뭔가 알고 있다. 묘하고 이상하게 찡한 반가움이었다. 리사 작가님의 글에서도 역시 "감정을 손님처럼 바라본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지나간다. 그뿐. 선명한 것은 나의 생각뿐.


화해할 대상도 없어져버린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가장 완벽한 몸의 조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