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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K Jul 18. 2023

빨래방이 삶 속 루틴이 된다는 것, 심플한 삶의 증거

뉴욕에서 경험한 빨래방의 낭만

 최재천 교수님에게 기후 변화 훈계 듣고 엄마한텐 등짝 맞을 얘길 수도 있는데, 나는 한번 입은 옷을 빨지 않고는 결코 다시 입지 않는다. (그래서 옷이 많아야 하는지도 모른다.라고 합리화) 내가 빨래하는 주기를 정확하게 알게 된 건 회사 다니면서 너무 바빠져 오로지 토요일 하루만 세탁할 기회가 주어지던 시절이다. (평일 저녁 시간 날 때 조금씩 해두던 습관은 결국 까먹고 잠들어버린 지난 저녁의 빨래를 새벽에 다시 돌려야 하는 과제만을 남겼다.) 


일요일엔 일정이 있어도 토요일엔 웬만하면 일정을 잡지 않는 편이다. 할 집안일이 많기 때문인데, 주로 대청소를 해야 하니 그렇다. 토요일 아침이 되면 계절이 어떻든, 무조건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모든 베딩 커버를 벗긴다. (1주에 한 번이 주기였지만, 지금은 2주로 타협한다.) 


#환기

환기는 아무리 겨울이어서 공기를 이미 데워놨대도, 여름이어서 차가운 공기를 머금었다고 해도 예외가 없다. 


#빨래 1-1, 1-2

다용도실에 큰 바구니 세 개를 가져와, 흰색, 색깔 있는 것, 수건으로 분리한 후 수건부터 세탁을 시작한다. 다음은 흰색 옷들의 애벌빨래를 위해 세제를 거품 내어 푼 물에 담가두고 간단하게 손으로 비벼 불려준다. 수건세탁이 끝나면 건조기로 옮기고, 흰 빨래를 돌린다.


#먼지제거

 흰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방 각각의 먼지를 청소기로 걷어내고, 락스 희석한 물로 마른걸레를 적셔 끼우고 스팀 걸레질을 한다. 바닥이 보송해지면 건조대를 꺼내 빨래를 꺼내올 준비를 한다. 


#빨래 1-3

 흰 빨래를 끝내고 꺼내와 건조대에 널어두고, 색깔 빨래를 시작한다. 다시 돌아와 큰 이불과 작은 옷들을 구분해 널고 식물에 물을 주고 있으면 수건 건조가 끝난다. 수건을 돌돌 말아 렉에 채워두고 물 주기를 마저 끝낸다. 


 #기타

냉장고에 무른 채소가 있는지, 이것저것 냉털로 재료를 꺼내 점심 준비를 하고 나면 토요일 오전은 이미 순삭 된다. 때에 따라 비가 오면 창틀 청소나 현관 물청소를 같이 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거나 머리가 복잡한 날에는 옷을 다 뒤집어 컬러 별로 정리하기도 한다.  


 이런 루틴을 가지고 있다 보니, 빨래방에서 빨래를 하는 일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식이라면 빨래방에 하루종일 있을 테니 그럴 거면 점주를 해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좁은 화장실 때문에 수전에 무릎뼈라도 부딪쳐 비명도 못 지르게 절규하는 날에는 진지하게 세탁기 없는 삶을 꿈꿔 보게 되지만, 아무래도 세탁 외주 서비스에 드라이클리닝은 잘 맡겨도 생활빨래를 맡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탁기라는 기계를 활용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지 체험하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나는 내가 함께 쓰는 세탁기에 신발을 돌리는 사람도 보았고? 속옷과 양말을 같이 빠는 경우도 보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관념일 뿐이라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일이었고, 세탁기는 그 이후로 나에게는 아주 사적인 살림도구가 되었다. 


#뉴욕 빨래방

 아무리 사적이라 해도 뉴욕땅에서는 예외가 없었으니, 다소 긴 여행 기간에 뉴욕에 머물게 되자 결국 한 번은 빨래방을 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숙소에서 추천받은 곳이었는데 묘하게 흥미롭긴 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피자집 옆 허름한 건물 1층에 공장형 코인 런더리가 즐비하게 늘어선 곳. 후끈한 공기가 밀려 나오는 그곳.


 아니나 다를까. 이미 세탁을 마친 카트에는 신발과 티셔츠 양말 등이 사이좋게 뒹굴고 있다. 같이 넣었다는 얘기다. 그래 뭐 어때 나도 해보자 뉴요커가 되어보는 관문인 거야! 사실 옷에 붙은 세탁가이드표를 까보면 그 기계 세탁에 들어갈 수 있는 옷은 많지 않았다. 디자인만 보고 산 옷들은 다 드라이클리닝 only 거나 레깅스, 탑 같은 기능성 의류라 찬물단독세탁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입을 옷이 없으니까 아쉬운 대로 세제를 사 와서 시작해 본다. (물론 통세척 세제로 먼저 통세척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서울에서 가져온 베이킹 소다 가루와 함께 빨래방에서 산 일제 세제를 넣고 빨래를 시작한다. 30분 만에 끝난단다. (고작 30분이라니 벌써부터 믿음이 가지 않는다.) 30분 동안 근처 홀푸드에 가서 이것저것 장을 봐 돌아왔다. 끝난 빨래를 꺼내어 건조기를 돌린다. 생각해 보니 장본 짐이 많을 것 같아 호텔에 올려두고 다시 돌아와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빨래들을 확인해 본다. 사실 건조된 빨래를 꺼내는 건 왠지 기분이 보송해지니 좋은 건 사실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나의 너바나 티셔츠가 크롭티가 되어있었다. 모가지는 팔뚝이 들어가면 다행일 것 같다. 물론 늘려 입어야겠지. 괜찮다. 이 정도의 상흔이라면 선방이라 해도 좋아.


#빨래방을 삶 속으로 들여온다는 것, 삶이 심플해진다는 증거

 빨래방이 삶의 루틴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곧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삶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옷이 망가지면 어쩌지.', '이건 괜찮을까.' 그런 옹졸한 마음을 가질 일이 없이 소비하게 될 것이다. 필요한 만큼의 옷을 아주 비싸지 않은 값에, 망가져도 크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상한선을 정해두고 소비하게 되겠지. 디자인이나 희소성, TPO 같은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실용이 된다면 많은 것들이 심플해질 것이다. 곱디 고운 쨍한 컬러의 이불커버나 폴란드 구스패딩 필파워 어쩌고 이불속을 새로 장만하고 싶을 때 다시 한번 생각하겠지, 과연 너는 이걸 코인런더리에 넣을 수 있겠느냐고. 어쩐지 이방인, 혹은 경계인 같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간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대신 종이 신문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고, 빨래방에 아무렇게나 쭈그려 앉아 머리를 쉬게 하고 또 생각에 잠기는 뉴요커 같은 아침을 열 수도 있겠다. 뭐든지 몸과 마음을 바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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