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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 N Mar 24. 2021

2021.03.24. 오후1시 15분

정말 잘 샀다!

처음 보는 순간 '이건 꼭 사야 돼'라는 확신이 드는 물건이 있다면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정말 사도 되는 걸까' 의심을 품게 되는 물건도 있다. 확신에 차서 산 물건이라도 막상 사고 나니 생각만큼 잘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것들도 있고 고민 끝에 긴가민가하며 찝찝하게 산 물건이라도 정말 잘 쓰는 것들이 있다. 여기서 스스로도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은 고민의 깊이와 가격이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가격이란 게 되게 주관적이면서도 상대적이어서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가방이 저렴해 보이기도 하고, 만 몇천 원 하는 소품 박스가 비싸 보이기도 한다. 


작년 말에 몇 날 며칠도 아닌 몇 개월간의 고민 끝에 산 물건 두 개, 핸드폰 목걸이와 립 프라이머는 왜 이제야 샀는지 모를 정도로 정말 잘 쓰고 있다. 핸드폰 목걸이는 어떤 드라마에서 나온 아이템인 것 같다. 이전 회사 동료가 목에 걸고 다니는 걸 봤는데 그땐 뭐 저런 걸 하고 다니지 생각하다가 사용하는 사람을 하나 둘 더 보게 되면서 점점 관심이 생겼다. 핸드폰을 자주 잃어버리고 심지어는 집에다 두고 출근하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주변에서 너도 핸드폰 목걸이 하나 사야 되는 거 아니냐고 추천을 해줬다. 추천을 받고도 정말 몇 개월을 고민했는데 그건 보기보다 비싼 가격 때문이었다. 투명한 핸드폰 케이스에 크로스백처럼 매고 다닐 수 있는 줄이 연결된 목걸이인데 별것도 아닌 게 무려 39,000원이나 된다. 이쁘지도 않은데 39,000원이면 맨투맨 한 장을 살 수 있는 돈이고 스타벅스 커피를 7번은 마실 수 있는 가격이라는 생각에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지르고 말았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걸 구매한 날 주식으로 5만 원 정도를 벌어서 공짜로 생긴 돈이니 써버리자는 마음으로 샀던 것 같다. 한참에 걸친 고민이 무색할 만큼 이 핸드폰 목걸이는 내 삶의 질을 몇 배는 올려준 2020년에 가장 잘 산 물건이 되었다. 더 이상 꽉 찬 만원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놓칠까 봐 손에 꽉 쥐고 있거나 주머니에 넣지 않아도 된다. 버스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졸더라도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거나 급하게 버스에서 내리면서 핸드폰을 두고 내릴 일도 없다. 또 이 기다란 목걸이 덕분에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찾는 일도 훨씬 수월해졌다. 


립 프라이머는 본래 립스틱이나 립 틴트 같은 립 메이크업 제품을 바르기 전에 발라 메이크업 제품의 발색을 도와주는 용도다. 입술이 워낙 건조한 편이라 어떤 립 제품을 발라도 각질이 부각되고 갈라지기 일수라 난 립 메이크업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디올에서 나온 연한 밤 타입 제품이나 핑크색 바셀린을 바르는 게 전부다. 가끔 기분을 내려 립스틱을 발랐다가는 몇 분 되지 않아 입술 각질과 제품이 엉겨 붙어 정말 지저분한 입술이 돼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립 프라이머를 극찬하는 친구의 후기를 듣고 립스틱을 잘 바르지도 않는데 나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 생각하다가 마침 면세점에서 크게 할인을 하길래 제품을 구입했다. 면세점이 아니었더라면 절대 백화점에서 서 제값 주고 사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게 2월 초인데 제품을 구입하고도 6개월 이상을 그냥 방에 방치해두었다. 그러다 이직을 하며 화장을 할 일이 늘어났고 새로 산 제품을 한번 써 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뜯었다. 별 기대 없이 립스틱 발색을 도울 목적으로 썼는데 웬걸 제품을 사용한 그날 나는 신세계를 경험하고 말았다. 바셀린이나 찹스틱 같은 그 어떤 입술 보습제 혹은 보호제보다 이 립 프라이머가 더 효과적인 역할을 해낸 것이다. 립 프라이머를 바르고 한 삼십 분 정도 지나면 입술 각질이 얇게 떨어지면서 입술이 한결 정돈되고 그 정돈된 입술에 다시 립 프라이머를 바르고 립스틱을 발라주면 각질이 부각되지 않은 깨끗한 립을 연출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각질 때문에 립스틱 한번 바르는 게 고역이었는데 난 이 좋은걸 왜 이제야 샀는지 후회될 만큼 만족스럽다. 


이제 나이도 나이이니 옷 한 벌을 사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사입자는 다짐을 했다. 옷도 사 입어야 하고 밥도 사 먹어야 하고 커피도 마셔야 하고 생필품도 사야 하고 종종 선물도 사야 하고 돈 들어갈 곳이 무지하게 많다. 맘에 드는 것마다 다 사면 모을 돈이 없으니 꼭 필요한 물건만 사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전보다 가격도 많이 따지게 되고 이러다 구두쇠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될 때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합리적인 가격에 잘 샀다고 생각했더라도 막상 사용하지 않는 계륵이 되기도 하고, 이건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다 싶어 사치라고 생각했던 물건인데 정말 잘 사용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웃프기도 하지만 이런 사건들로 인해 나의 취향이 생기는 것 같아 좋다. 나만의 애정하는 아이템이 하나 둘 늘어가고 그만큼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존재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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