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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자를 만드는 관문, 나눗셈은 왜 어려울까

분수의 나눗셈이 수포자를 양산하는 범인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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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자가 생겨나는 지점 중 대표적인 내용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배우는 분수의 나눗셈이다. 이미 배우고 난 이후에야 분수든 나눗셈이든 쉽게 생각하지만, 배우는 시점에서는 정말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일단 [분수]는 덧셈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분수도 어려운데, 분수의 나눗셈까지 이해하라고 하니 도무지 받아들일래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눗셈은 역수의 곱셈과 계산 결과가 같다는 걸 암기하고 문제집을 저쪽으로 치워버리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나 자신의 자녀가 분수의 나눗셈이 이해가지 않아서 물어보면, 나도 잘 모르니까 그냥 외우라고 알려주겠지.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결국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불변량을 찾아 이름붙이는 것에 있다. 그걸 거창한 말로 문제해결력을 기르기 위한 문제설정능력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모든 것을 기계로 대체하는 요즘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능력이 바로 문제설정능력이 아니던가. 난데없이 수학 전공이 인기 과목이 되고, 이공계열과 의학계열 지원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 취업 때문이긴 하지만, 시대의 요구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꼭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수포자를 막을 방법이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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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준평론



수포자를 만드는 관문, 나눗셈은 왜 어려울까




0.

사칙연산만 하면

충분하다는 오해


수학은 사칙연산만 할 줄 안다는 충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학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대표적인 오해인데요. 사실 사칙연산만 잘한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죠. 사칙연산을 벗어난 수준의 다양한 수학이 업무를 포함하여 실생활에 사용되는 예시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면,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에서 언제나 고려하는 [경우의 수], 출퇴근할 때마다 고려하는 [최적화 동선], 어디에나 또라이는 반드시 존재하는 평균 회귀의 법칙의 상징 [정규분포], 코로나 감염자 수치를 예측할 때 필요한 기초 모델인 [로지스틱 곡선] 등 정말 다양한데 말이죠.


이러한 오해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은 수학을 어려워했던 사람, 소위 수포자가 어렸을 때 겪었던 수학 공포를 잊기 위해 만들어낸 나름의 자구책이자 수학을 못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조적인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수학적 모델은 신경 써서 집중하여 보지 않으면, 못 보고 그냥 지나치기가 쉽기도 하고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은 영역에서 자동화가 이뤄진 것도 영향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초중고 12년 동안 배웠던 수학 중에서 자신이 직접 써먹을 만한 내용이 사칙연산밖에 없다면, 그동안 수학을 공부하느라 낭비한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을 공부하느라 사용했던 노력이 아무 쓸모 없었다는 점이 안타깝고요. 심지어 사칙연산마저도 이제 나보다 똑똑하고 정확한 계산기와 스마트폰에게 넘기면, 우리가 배웠던 수학은 이제 아무 짝에도 쓸데없게 되고 마는 것 아니겠어요?


오해하기는 쉽고 오해를 바로잡기란 오래 걸리고 어렵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오해했던 세월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오해를 바로잡는 일은 꼭 필요하지만 지겹습니다. 게다가 나름 오해할 만하니까 오해하지 않았겠어요? 쉽게 오해하는 게 속 편하고, 늘 신경 쓰면서 사는 건 정말 피곤하기 때문이죠. 오해하겠다는데, 굳이 바로 잡아야 할 이유도 없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쨌든 오해를 바로잡는 일은 이제 각자의 선택에 맡기기로 하고, 오늘은 그 [사칙연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합니다. 사칙연산'만' '잘'하면 정말 충분하도록 말이죠.




1.

사칙연산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본능과 감정


사칙연산은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의미합니다. 교육과정상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순서대로 배우는데요. 덧셈과 뺄셈은 1~2학년, 곱셈과 정수의 나눗셈은 3~4학년에 배웁니다. 특히, 분수와 소수의 나눗셈은 5~6학년 때 배우게 되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분수의 나눗셈이 바로 수포자를 만들게 되는 지점이 됩니다. 수포자를 생산하는 나눗셈 얘기부터 하고 싶지만, 나눗셈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다른 연산을 먼저 얘기해보겠습니다.


덧셈은 본능에서부터 피어나온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뭐든 두 개가 주어지면 두 가지를 섞어보거나 합쳐보고 싶지 않습니까? 짜장면이랑 짬뽕이 있으면 짬짜면을 선택하고 싶잖아요. 두 가지가 주어지면 누구나 다 섞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듭니다. 라면과 스프를 쥐여주면 그냥 섞는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내용물이 주어지면 바로 섞기만 하면 되도록, 섞어야 할 대상을 잘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각각 어떤 비율로 섞어야 좋을까를 고민하거나, 어떤 환경에서 섞으면 될지를 짚어주는 것처럼 말이죠. 어떻게 섞으면 좋을지 오랫동안 고민하는 사람이 창의적인 인재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곱셈은 반복하는 것을 싫어하는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덧셈을 여러 번 하면 곱셈이 되는데요. 여러 번 반복해서 일하라고 하면 누가 좋아합니까? 똑같은 일을 계속하는 건 인간이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 될까를 고민하게 되죠. 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해본다든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든지, 기계를 만들어 이용한다든지 하는 형태로 변화합니다. 이러한 고민이 기술의 진보를 가져오게 되었죠.


뺄셈은 거꾸로 바라보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역지사지 정신으로 볼 수 있는데요. 덧셈을 거꾸로 하면 뺄셈이 된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거꾸로 생각하는 건 나의 욕망에 반대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는 건 메타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된다면, 자신의 역량에 맞춰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테니까요. 거꾸로 생각해 보는 훈련이 창의성과 문제해결력을 기르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인 이유입니다.


나눗셈은 기존의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뺄셈에서도 일부 발견할 수 있는데요. 자연수만 존재하던 세계에 뺄셈이 등장하면서, 0도 생겨나고 음수도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뺄셈은 단순히 부호만 붙여 넣으면 되었지만, 나눗셈은 여기에 한 발 더 앞서 나가는데요. 기존의 세계관으로만 생각하는 상황을 파괴합니다. 자연수와 정수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기에 [분수]라는 개념을 가져오는 것이죠. 그래서 기존의 세계관을 바꿔서 더 큰 세계관으로 확장을 끌어내는 혁신을 일으키죠.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기에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들어놓는 나눗셈을 배우는 게 가장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2.

수포자를 만드는 관문

나눗셈은 왜 어려울까


나눗셈이 어려운 이유는 나눗셈 속에 덧셈과 뺄셈과 곱셈을 여러 차례 빨리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곱셈을 잘하기 위해서 구구단을 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구구단을 배운 목적은 곱셈을 빨리하기 위해서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곱셈을 빨리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없잖아요. 그냥 곱셈은 여러 번 더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구구단을 배우는 목적은 [곱셈]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바로 [나눗셈]을 하기 위해서인데요. 살다 보면 나보다는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인 경우가 많다는 걸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주 단순한 나눗셈을 하려고 해도 어림짐작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곱셈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18 나누기 3을 하려고 해도 삼일은 삼, 삼이 육, 삼삼은 구, 삼사 십이, 삼오 십오, 삼육 십팔까지 여섯 번이나 계산을 해야 답인 6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나누어떨어지지 않으면, 나머지를 알아내기 위해 뺄셈까지 해야 합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연산을 빠르게 해야하기 때문에 나눗셈은 수학을 포기하게 만들고, 배울 게 많아서 갈 길 바쁜 학생의 발목을 잡게 되죠.


나눗셈은 사실 역수의 곱셈과 결과가 같다는 결론 한 줄을 얻어내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계산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3/4를 5/12로 나눈다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단순히 값을 계산하는 것에만 의미를 둔다면, 12/5를 곱하면 끝날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생각보다 몹시 어렵습니다. 3/4 안에 5/12가 몇 개가 들어있는지 생각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통분을 이용하여 그 의미를 좀 더 추적해보면, 9/12 안에 5/12가 몇 개 들어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9/12 안에 5/12는 1개 들어있고, 4/12만큼 남게 되죠. 나눗셈의 의미만 따진다면 여기에서 끝나야 합니다만, 4/12는 5/12를 기준으로 4/5만큼 더 있다고 생각하게 되죠. 결과적으로 1과 4/5 개 있게 됩니다. 이런 과정 때문에 초등학교 이후로 쓸 일이 없는 [대분수]를 배우게 되죠. 분수의 나눗셈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다양하게 시도하지만, 결국 역수의 곱셈과 결과가 같다는 내용만 외우고 끝납니다.




3.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ArticleOrgnl.do?cn=JAKO201625058598120


나눗셈을 공부하다 보면 가장 짜증 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나머지인데요. 실제로 정상태 선생님께서 10÷2.4의 문제에서 몫을 4, 나머지를 4로 기록한 사례로 논문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머지는 0.4가 맞긴 하는데, 세로 셈으로 계산하다 보면 곧잘 나오는 실수이기도 하죠.


나눗셈을 하다보면 나누어떨어지는 경우가 드물고, 늘 뭔가 남습니다. 남는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늘 고민이죠.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으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은 걸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 분배는 더 어렵고, 나누어떨어지지 않아 남은 나머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더욱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 먹죠.


어쨌든 나누어떨어지지 않는 나눗셈은 조금 이상한데요. 19÷6 = 3 … 1을 보십시오. 답이 3이라는 건지, 1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계산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수를 알고 나면 저런 걸 왜 배웠나 싶지만, 자연수밖에 없는 기존의 세계관에서는 저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나눗셈을 배울 때는 꼭 사과 19개를 6명에게 나눠준다는 예시 상황을 덧붙여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마치 2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1차원에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듯한데요.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눠서 나눗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두 개의 변수 a, b를 분수 a/b로 만들어 세계관을 유리수로 확장하고 난 후에야 이 복잡한 문제는 다시 1차원으로 돌아와서 해결되고 맙니다. 나눗셈이 확장해줬던 세계관이 변화했던 경험은 역수를 곱하는 것으로 대체해버린 채, 마치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듯 까맣게 잃어버리죠. 이래서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하나 봅니다.




4.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까닭


나눗셈을 공부하면 조금 이상하게 생긴 나눗셈 정리를 배웁니다. 임의의 양의 정수 a, b에 대하여, b=aq+r, (0 ≤ r <a)를 만족시키는 정수 q, r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나눗셈을 배우면서 유일함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되는데, 생각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게 넘어가는 것같아서 아쉽습니다. 나눗셈이 유일하든 말든, 계산만 된다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여기에서 유일하다는 표현은 수학에서 꽤 중요한 탐구 대상입니다. 이 유일함을 이용해서 수학에서 배우는 다양한 정리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수학은 약속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일하지 않으면 약속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지 않으면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뜻이죠. 예를 들어, 221/70을 계산하면 몫이 3이고 나머지는 11입니다. 그런데 몫을 3.1이라고 말하고 나머지를 4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상황에 따라서는 몫이 정수인 것보다, 나머지가 적은 게 더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수학에서는 이렇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말하지 않습니다. 몫과 나머지는 반드시 정수여야 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나머지가 적은 상황이 더 중요하면, 거기에 걸맞은 이름을 또다시 약속해서 쓰는 게 맞습니다.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바꾸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고 코에 붙이면 코걸이가 되도록 해석을 열어두는 모습을 보면 분개하게 되죠. 때로는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을 참 순수하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합니다. 이렇기에 약속한 곧이곧대로 지키는 것을 숭고한 가치로 여기는 순수함이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을 융통성 없고, 고루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이럴 때마다 수학과 세상의 거리는 조금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5.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불변량을 찾으려는 욕망


https://v.daum.net/v/20221110193450540


하나의 용어에 다양한 해석이 붙을수록 세상은 점점 복잡해집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 사는 건 너무 머리가 아픈 일이니, 더 정확하게 약속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9시까지 출근할 때 10분 일찍 오라고 지시하는 것은 부당한 요구라는 대법원 판례까지 나왔죠. 지각하는 사람을 바로잡기 위해 지시했을 사측의 입장도, 근로기준법에 따라 근로 시간보다 일찍 출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근로자의 주장 모두 이해 가지만, 이 당연한 결과를 얻기 위해 대법원 판례까지 쓰는 건 소 잡는 칼을 닭 잡는데 쓰는 느낌이랄까요.


이제 저렇게 공들여 대법원 판례가 나왔으니 세상은 달라질까요? 10분 일찍 나오라고 말할 사람은 계속 말할 것이고, 일찍 출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사람은 계속 말할 테니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차라리 특정 시간을 지키는 것이 해당 업무에 있어서 더 중요한 가치였다면, 아예 30분 일찍 출근해서 30분 일찍 퇴근하도록 새롭게 약속하는 게 더 나은 해결책이지 않았을까요?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복잡한 세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무엇이 변하지 않는지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변하지 않는 불변량이 마침 유일하다면 이름을 붙일 수 있겠죠. 예를 들어, 위 상황에서는 대법원 판례가 나오더라도 사람들의 행동 습관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 불변량이 될 것입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 변하지 않는지에 집중해야, 양측이 모두 만족하는 해결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수학을 오랫동안 배웠음에도 수학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사칙연산에만 두었다면, 참 아깝고 안타깝다고 했었죠. 수학을 배우는 이유는 주변 상황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불변량을 찾아 이름을 붙이려는 노력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문제해결력의 기본인 문제를 설정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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