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제가 나름 만들어 본 사람의 평가기준인 고집도를 잠깐 다루었습니다. 고집도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들을 때 바뀌는 사람인가에 따라 결정되는데요. 사실 고집도는 가치중립적입니다. 고집이 세다고 나쁜 것도 아니고, 고집이 약하다고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거든요. 고집이 세다고 해서 매사에 고집을 부린다면 독불장군 같아서 싫을 수도 있겠으나, 반대로 상황에 따라 고집이 뚝심으로 보일 수도 있죠. 매사에 고집이 없으면 성격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겠지만, 물에 술 탄 것같이 중심이 없어 보일 듯합니다. 정말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요. 결국 상황에 맞게 얼마나 유연함을 갖고 고집을 부리는지가 핵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은 옛날 말로 낄끼빠빠를 갖춘 고집쟁이, 요즘 말로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을 갖춘 고집쟁이가 되면 되겠죠?
알잘깔딱센을 갖춘 고집쟁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말이 쉽지, 노력을 통해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고집이 원래 셌던 사람이 자신의 고집을 꺾는 일은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야 보기 드문 일인데요. 반대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고집이 약한 사람이 어느 날 고집을 갖게 되면 상당히 감당하기 벅차죠. 이러한 유연함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예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제 이야기에서 꺼내와야 되겠죠. 100%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저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납받았던 경험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유연함을 갖춘 고집쟁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 [용납받은 경험]이 이끌어낸 변화
자신보다 더 강한 고집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고집이 꺾이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는 완전히 고집이 꺾인 채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죠. 그렇지만 내재해 있는 고집은 남아있기 때문에 공격적인 면모를 띕니다. 그래서 수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이러니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성격인 [수동공격적]이라고 부르는데요. [수동공격적]인 상태로 장시간 방치되면,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행복의 길로 가지 못할 망정, 불행의 길로 접어들어선 안 되겠죠.
반대로 자신의 고집이 단기간 동안만 꺾여있을 뿐, 향후 더 큰 투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요. 어렸을 때 고집을 부리다가 부모님께 혼났던 경험이 많이 있으실 겁니다. 부모가 아이의 고집을 꺾기 위해 협박을 하는 과정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가짜 협박에 너무 자주 노출되면, 오히려 내성이 생긴다고 합니다. 아이가 협박에 내성이 생기게 되면 좀 더 강한 수단으로 아이를 제지하게 되고, 이런 방식으로 시간이 지나다 보면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가 성장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반드시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솝 우화, 해님과 나그네를 기억하시나요? 강력한 바람으로 몰아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고 했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강력한 태풍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이었습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건 [용납받았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용납이란 상대방을 100%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경험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용납하는 입장에서 100% 용납하지 않았어도 당사자는 용납받았다고 느낄 수도 있긴 합니다. 심지어 용납받은 경험이 있다고 해도 모두 자신의 고집을 꺾는 것도 아니고요. 굳이 고집을 꺾을 필요도 없고요.
하지만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납받은 경험이 있다면,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풍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변이 두 가지 부류로 나눠져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알잘깔딱센을 갖춘 사람들]로 나뉘어 보인다면, 전자보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좋아 보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알잘깔딱센을 갖춘 사람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저는 이 변화된 삶 이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용납받은 경험]에서 온다고 생각하고요.
위에서 들었던 예시와 달리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께 혼난 적이 없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제 인생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 늦게 배운 편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이치를 조금 빨리 배웠더라면 좀 더 일찍 세상을 겸손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도 드는데요. 만일 제가 가진 고집이 좀 더 빨리 꺾였더라면, 제가 삶의 방향을 좀 더 빨리 다르게 세워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제 고집이 늦게 꺾였기 때문에 [용납받은 경험]이 변화된 삶 이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는 내용을 몸으로 직접 깨달을 수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래서 지금의 제 삶도 나름 만족하고 살 수 있는 듯합니다. 제가 처음 누군가에게 용납받았던 경험은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입니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스스로 제 정체성을 뭔가 잘하는 사람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잘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존재가 소유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기란 참 쉽지 않았네요.
3. 고집을 부려야 할 때를 알고 부리는 자의 삶
성장과 성숙은 실제로 체감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가졌습니다. 둘 다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요. 어렸을 때, 오랜만에 만나는 삼촌/이모들에게 많이 컸다고 이야기를 들으면 전혀 감흥이 안 느껴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제가 그 얘기를 조카들에게 하고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대신 저는 조카들에게 그동안 많이 컸다고 얘기하면서, 너는 하나도 안 컸다고 생각하는데 삼촌이 많이 컸다고 말하니까 좀 어색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 주죠.
성장과 성숙의 차이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에 드러나느냐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성장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눈에 드러나기라도 합니다만, 성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변화라서 실제로 성숙이 진행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숙이야말로 바로 알잘깔딱센을 갖춘 게 아닐까요? 제가 이해하고 있는 성숙은 자신의 고집도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지만, 아무 때나 고집을 부리지 않고 이제는 고집을 부려야 할 때를 명확하게 알고 부리는 것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