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전 운전을 잘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원래 앞서 작성했던 글과 한 편의 글로 묶어서 한 번에 쓰려고 했지만, 글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독자들이 좋아요를 누르기도 전에 도망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글을 나눠서 써봅니다. 앞선 글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를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잘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다가 자칫 빠질 수 있는 번아웃 증후군을 예방하려면, 본캐와 부캐를 나누는 연습을 미리 해두면 좋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한 줄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참 길게도 했다 싶은데, 이렇게 한 줄이면 끝날 얘기를 길게 쓰는 것도 나름 재주라면 재주네요. 그렇죠?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다시 말해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그에 앞서 탁월함이란 무엇일까요? 어느 정도까지 해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탁월함이 무엇인지부터 감을 한번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2004년에 운전면허를 땄는데요. 20년 가까이 장롱면허로 지내다가 2021년에 갑자기 뜻하는 바가 생겨서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뜻하는 바가 무엇이었냐고 물어보신다면, 불편함이 두려움을 초월했다는 뻔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전 초보가 운전을 시작하면 무조건 사고를 낼 수밖에 없다고들 주변에서 말씀하시길래, 어떻게든 사고를 내지 않도록 열심히 준비했는데요. 사실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바로 운전을 했어야 감을 잡았을 텐데, 저는 본래 운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리 따두면 좋은 거라고 어머니에게 억지로 떠밀려 운전면허를 딴 케이스였는데, 마침 차도 없어서 면허를 따고 나서도 계속 운전하지 않았죠. 뒤늦게 운전을 배우려고 하니 감이 다시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 겁이 났습니다. 사고 낼까 무서워서 배우고 싶지 않았던 운전을 이제서야 따로 돈 주고 배우려니 좀 돈이 아깝기도 했고요. 때마침 아버지께서 정년이 다가오시게 되어 이제 일하는 날보다 쉬시는 날이 더 많아지셨습니다. 마침 우리 아버지는 운전의 고수이신데, 다른 사람에게 배울 필요 있겠나 싶더군요. 평소 고향에 내려갈 명분이 없어서 자주 고향에 안 내려가곤 했었는데, 운전 배우기를 명분 삼아서 고향에 자주 내려가서 가족을 만났습니다.


우선 주행의 감각부터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공설운동장에서 계속 뱅글뱅글 돌면서 주행을 반복해서 연습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한 번에 3시간씩 대략 5번 정도 배우니까 이제 도로주행까지는 손쉽게 하게 되었는데요. 나름 운전하는 것에 어느 정도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몇 번 옆에 사람을 태우고 운전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들은 주로 동생들이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모두 똑같이 제게 한결같은 반응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 아직도 멀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형, 정말 죄송한데 제가 운전하면 안 될까요?"


워낙 태생이 쫄보라 주행할 때 속도를 많이 내지 않아서 주행은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운전을 두려워했던 건 주행이 아니라 주차 때문이었습니다. 주차를 잘못하다가 급발진으로 전봇대를 들이받아버리거나, 주차하다가 옆 차를 긁을 게 염려되어서 운전하기를 저어했었더랬죠. 지금은 주행의 감이 조금 잡혔음에도, 시간 날 때마다 계속 주차 연습을 했지만 아직도 주차는 잘 못합니다. 그렇다고 주행을 잘하는 건 아니고요.


그런데 저는 운전을 못하는 걸 별로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 주변의 어떤 혹자는 그 나이에 운전 못하는 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이라고 잔소리하기도 하지만, 남들이 다 잘한다고 굳이 저도 잘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음주운전이나 전방주시소홀 등이 문제 되는 거지, 조금 투박하더라도 그냥 사고만 안 낼 정도로 운전하면 정말 안 되는 건지 궁금했죠.


그렇다면 말이 나온 김에 옆자리에 앉은 동생들에게 운전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답변을 들은 바로는, 자동차와 자기 자신이 마치 한 몸이 된 것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차할 때 자신이 자동차를 옮겨다 놓는 게 아니라, 자기 몸이 해당 공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절하는 단계가 될 때 잘하는 거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경지는 도대체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그건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냥 계속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언젠가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원래부터]와 [하다보면]인데요. 왜냐하면 [원래부터]가 상징하는 [유전]과 [하다보면]이 상징하는 [감각]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반복해서 감각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면,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경지에 도달하기야 하겠지 싶은데요. 그런데 저는 지금 당장 차도 없고, 굳이 운전을 좋아하지도 않으며, 별로 잘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잘하고 싶지 않은데, 왜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냥 쿨하게 못한다고 인정하면 되는 걸, 그저 내 부캐 중 하나가 이 나이 먹도록 운전 하나 제대로 못하는 아픈 손가락인 걸 받아들이면 되는 걸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짚어보자면, 운전을 못한다고 지적하는 상황에서 지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부캐와 본캐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부족한 사람인 상황을 받아들이는 걸 마치 본캐가 부족한 사람인양 자극받은 것이죠.


앞서 저는 철저히 본캐와 부캐를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본캐를 무색무취의 존재로 만들면, 언제나 스스로 배움이 부족하다는 갈증이 생깁니다. 제 본캐는 성장하려고 하는 욕구로 가득 찬 녀석으로 만들어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물론 제가 기존에 갖고 있던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해당 능력을 가진 부캐를 소환해서 일을 처리해 버리죠. 그러니까 잘해야만 하는 스트레스는 제 부캐가 받을 뿐입니다. 제 본캐는 뭐든 잘하지 않으면서, 늘 겸손한 자세로 어떤 것이든 배우겠다는 갈증을 품은 상태로 내버려 둡니다. 본캐와 부캐를 끊임없이 분리하는 것, 이 방법이 행복으로 가는 길은 아닐 수 있어도, 적어도 번아웃 증후군 같은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혹자는 적당한 긴장감과 스트레스는 자신의 탁월함을 향상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저는 매사에 긴장하면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끊임없는 자기 복제와 싸우고,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만, 적절한 예시를 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제 과거 얘기를 꺼내볼까 하는데요. 5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부캐 없이 평생 하나의 캐릭터로만 살았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탁월함을 추구하는 게 도가 지나쳐서, 저를 새로운 분야에 던지는 걸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새로운 분야에 저를 던져야만 제 안에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나서 제 부캐가 되는 법인데, 부캐가 많아지면 제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자신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부캐를 키울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제가 잘하는 것에만 매진했습니다.


저는 제 정체성이 무너지는 게 무서웠습니다. 정체성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탁월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했죠. 제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과거의 제가 쌓아 올렸던 노력은 정말 바보 같았던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잘했던 부캐 덕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핵심을 빨리 잡아내어 논리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을 놓고 전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평생을 불행 속에 살게 되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죠. 때로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데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우직하게 하던 대로 익숙한 방향으로만 해결하려는 고집을 부리게 되죠. 이런 과정에서 본캐가 상하게 되는 일까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본캐가 심각하게 상하는 일을 겪고 나서야, 그동안 제가 살아왔던 방식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본캐와 부캐를 끊임없이 나누려고 애썼는데요. 그렇게 부캐를 찾아서 구분하고 나서야 제 본캐는 무색무취의 존재이고,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언제나 배우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본캐를 찾아낸 이후, 저는 언제나 주변에 사과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제 부캐가 해놓은 실수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죠. 예전 같았으면 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책임을 져야 하냐고 손사래 쳤던 일들도 이제 이야기를 좀 듣다가 잘못했다 싶으면 금방금방 사과하고 책임도 집니다. 마음 한켠에서는 이건 제 부캐가 저지른 일이니까 대신 책임진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제 본캐는 제가 가진 다양한 부캐들을 소환하고, 관리하고, 운영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제 부캐 중 어떤 부캐는 아직도 덜 사회화가 돼서 가끔씩 우쭐대곤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제 본캐가 나타나 다시금 평정을 되찾고,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겸손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모습이 일관적이지 않은 이중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제가 운영하는 부캐가 여러 개인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매사에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제 부캐가 그동안 저질렀던 잘못을 그저 본캐가 나서서 사과하고 책임지는 수밖에요.


다시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였던,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탁월함이란 재능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노력으로 극복 가능하다고도 말하는데요. 재능과 노력이 모두 없는 경우는 배제하고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재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데 잘하는 경우는 무슨 경우일까요? 저는 어떤 주제를 잘하든 못하든, 심지어 관심도 없는데 특정한 주제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착력, 좀 거칠게 말해서 존버 정신이 타고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이런 사람에게 재능과 노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탁월함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는 운에 따라 달렸습니다. 조금 덜 노력해도 잘 해내는 능력을 유전적으로 타고났을 수도 있고, 자신이 노력하는 방향과 시대의 흐름이나 유복한 환경과 잘 맞아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별로 좋지 않은 가정환경이 자신을 먼저 성숙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죠.


다치바나 아키라의 책, [말해서는 안 되는 너무 잔혹한 진실]과 케빈 리먼의 책, [나는 왜 나인가?]를 읽고 저는 스스로 탁월함이란 무엇인지 생각을 정리해보았는데요. 우리의 인생은 유전적인 요소로 80%, 생후 5년 이내에 만나는 환경으로 15% 정도 대부분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자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꾸고 나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집착력을 일반화시키는 우를 범하겠죠. 즉, 자신에게 없는 탁월함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안에서 탁월한 점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설명한 '나는 이렇게 살았다' 류의 합격수기를 보거나 간증 같은 걸 들을 때 언제나 주의해야 하는데요. 합격수기는 합격한 사람만 쓰는 글이니 불합격한 사람들의 상황은 배제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글을 작성한 개인의 기억도 희미해지며, 글을 쓰는 사람이 글이 가져올 파급력 등을 고려하여 자체 필터링하는 경향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글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합격수기나 간증은 철저히 간접경험의 차원에서 그쳐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각자 가진 재능/환경/노력이 다른데, 당사자와 나 사이의 다른 점을 인식하지 않고 방법론만 붙들고 늘어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는 관용이 필요하고, 그 수기를 보고 나도 저 사람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합격한 사람이 했던 행동을 단순히 따라 하는 모방에서 시작해서 왜 그런 행동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따져보아야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걸러내는 과정을 통해, 합격자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핵심적인 방법론만 남게 되는데요. 이것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핵심만 남기고 나머지는 쳐낸 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자신만의 방법론을 채워나가면서 완성해 나가야 목표를 달성하는데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종종 학생/학부모들과 진로를 놓고 상담하는 일이 있는데요. 저는 제 앞에 앉아있는 학생이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줄 수 없습니다. 그저 학생이 말하는 이야기를 쭉 듣고, 어떤 쪽에 관심이 있는지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죠. 저는 학생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 학생이 가진 정체성, 다시 말해 본래 갖고 있던 본캐와 남몰래 키우고 있던 부캐가 무엇인지 집중합니다. 다행히 본캐와 부캐가 무엇인지 제대로 감을 잡았다면, 학생이 말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본캐와 부캐에 맞게 앞으로 해볼 만한 진로를 같이 고민해 볼 수 있겠죠. 어쩌면 스스로 답을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돕는 걸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본캐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본캐의 목적은 따로 있는데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는 모습이 자신의 부캐인 것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죠.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본캐의 몫이라면, 잘하는 것은 부캐의 몫인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자신의 부캐와 관련된 직업을 선택하려고 하는 경우, 부캐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 주의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조언해주죠.


지금까지 그렇게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방패 삼아 불행을 피하는 길을 설명해보고자 했습니다. 각자 정의하는 행복이 다르기에,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는 건 사람마다 다르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불행을 피하는 법은 충분히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자신의 캐릭터를 본캐와 여러 개의 부캐로 나누어보고 각각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통해 불행을 미리 예방하고 피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


존재가 소유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어야 당연한데, 살다 보면 소유가 존재보다 더 중요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경우가 있죠.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자칫 상대방의 정체성을 부정하진 않을까 조언할 때 염려가 되기도 하고요. 이런 과정을 오랫동안 고민해보고 나서 저는 나름의 해답을 찾은 것 같아서 공유해보았습니다. 탁월함을 추구하는 내용을 다루기에 추상적이라 좀 와닿지 않아서 많이 복잡하고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11화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