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에서 방영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마녀체력 농구부를 봤습니다. 해당 프로그램을 안 보셨을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프로그램을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농구 예능 프로그램인 뭉쳐야 쏜다와 비슷한 느낌으로 만든 것 같은데요. 기존 프로그램과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 농구를 하는 대상이 스포츠 레전드 선수들이 아니라, 여자 연예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출연하는 감독은 문경은 전 서울 SK 감독이고, 코치는 전작 뭉쳐야 쏜다에서 활약했던 현주엽 코치입니다. 매니저는 개그맨 정형돈이 출연하고, 선수로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들은 송은이, 고수희, 별, 박선영, 장도연, 허니 제이, 옥자연, 임수향입니다. 이 여덟 명의 선수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운동을 잘할 수 없는 신체를 가졌거나, 운동에 완전히 관심이 없던 문외한이라는 점입니다. 2월 15일에 첫 방송을 했고, 화요일 저녁 9시에 방영됩니다.
방송이 시작되자, 감코진과 정형돈 씨가 처음 등장해서 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했는데요. 그 이후로, 송은이 씨, 장도연 씨를 비롯한 여자 연예인들이 한 명씩 등장해서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무려 여덟 명의 여자 연예인이 순서대로 등장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으로 똑같이 응대하는 인터뷰를 진행했는데요. 갖고 있는 지병은 없는지, 농구는 좋아하는지, 농구를 본 적은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습니다. 선수들이 한 명씩 소개될 때마다 계속 감독과 코치는 의아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이 방송이 뭉쳐야 쏜다 2를 한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계속 여자 연예인들이 들어오니 약속과 다른 상황 때문에 많이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왜 여자 농구 프로그램을 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느냐는 일각의 비판도 있다고 하는데요. 문경은 감독이 선수 시절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은 맞지만, 아직 방송 출연이 익숙하지 않으니, 체육인 특유의 날것의 감성을 숨기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 정도는 초보 방송인이 저지르는 실수 정도로 봐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아무래도 방송 경험의 차이인지 몰라도 현주엽 코치는 바뀐 상황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애쓰는데, 문경은 감독은 전혀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능에서 비친 문경은 감독은 상당히 조급해 보였고, 상황 파악이 너무 느리다 싶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농구인으로서는 확실한 레전드이지만, 예능인으로서는 초보에 불과하다는 티가 확실히 많이 났죠. 여자 연예인이 3명 정도 들어오면, 이건 제대로 하는 농구 예능이 아니라는 걸 감 잡았어야 했는데, 여전히 핸드볼 레전드였고 뭉쳐야 쏜다에 출연했던 윤경신 선수가 오길 바란다던지, 여자농구의 전설 박찬숙 선수가 들어오길 바라는 모습이 보여주었습니다. 문경은 감독은 예능을 예능으로 즐기지 못하고, 상당히 초조해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유튜브에서 보여주는 방송 클립 영상을 보면서 한참 동안 배꼽 빠져가면서 웃었습니다. 저는 왜 이 영상을 재미있다고 느꼈을까 고민해봤는데요. 일단, 핵심은 감코진(감독/코치진)과 선수단이 보여주는 상반된 반응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코진은 우리나라 농구선수 중에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능력과 경력을 가진 문경은과 현주엽입니다. 저는 문경은 선수가 상무에 있던 시절, 사실 상무가 무슨 말인지도 몰라서 팀 이름이 조금 촌스럽다고 생각했을 어렸을 때, 문경은 선수가 시원시원하게 쏘던 전매특허 3점포를 매우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경은 선수는 은퇴 후, SK에서 농구 코치 및 감독으로 10년 동안 재직했지만, 과연 제대로 된 성과가 있었나 생각해볼 때 아쉬운 점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문경은 감독은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경험할 정도로 독보적인 기록을 가진 사람이지만, 외국인 용병인 애런 헤인즈가 있을 때 말고는 팀을 플레이오프에 이끌고 나가지 못한 불명예 기록을 갖고 있는데요. 애런 헤인즈가 외국인 용병까지 아우르는 인성을 가진 선수라는 평가까지 듣고 있다는 것을 놓고 봤을 때, 문경은 감독은 우승 경험이 있기는 하나 아무래도 [명선수는 명감독이 되지 못한다]의 예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어쩌면 문경은 선수는 엘리트 체육인으로 살아오면서, 프로농구선수/코치/감독의 길을 걸었고, 그의 인생철학은 언제나 잘하는 게 목표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경력을 갖고 있어도 직업을 잃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인생을 지배했던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10년 동안 했던 감독 자리에서 내려온 만큼 마음을 좀 내려놓아도 될 것 같은데, 아직도 초조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그는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예능은 선수들의 성장기를 보여주는 걸 빌미로 [감코진의 성장기]를 다루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문경은 감독이 선수 시절 국민들에게 최고의 감동을 선사해줬던 기억이 여전하기에, 저는 그가 언젠가 다시 코트에 복귀해서 감독으로 일하게 될 날을 기대합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한층 성장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것 같고요.
방송에서 비치는 문경은 감독의 어색한 모습을 보고 깔깔대긴 했지만, 이면에 기분이 살짝 묘했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왜냐하면 사실 저도 문경은 선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가 보여주는 어색한 모습에 연민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일을 맡게 되면 언제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는데요. 사실 맡은 일에 충실하여 성과를 내야 한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잖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성과에 목을 메어야만 할까요?
혹시 스스로 지난 인생을 돌아봤을 때,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다행히도 저는 대학생 때 분명히 저 얘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제 반응은, 그럼 열심히 하지도 말고, 잘하지도 말라는 얘기냐고 도리어 따져 들면서 이런 것도 못하면 전 도대체 뭐가 되는데요?라는 식으로 반항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과거인데요. 탁월함을 추구하던 제가 느끼기로 저런 말 한마디가 스스로를 약하게 만드는 거짓 위로라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당시 뭔가를 잘한다는 건 곧 특징이고, 특징은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된다고 생각했는데요. 예를 들어 아무도 농구를 못하는데 혼자 농구를 잘하면, 농구 잘하는 아이로 인정받게 되지만, 저보다 농구를 더 잘하는 아이가 들어오게 되면, 단순히 농구를 못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농구를 잘하는 아이라는 정체성을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도 행복하지 않죠. 인생은 원래 고통의 연속이야 라고 부르짖으면서, 이런 고통은 성장통이라 착각하면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히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맡은 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건 미덕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잘하려고 최선을 다해 애쓰다가 결국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게 되면, 무력감과 함께 현타가 오기 마련인데요. 이렇게 현타가 지속적으로 오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되면,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번아웃 증후군을 예방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번아웃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특징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주요 골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평소 여러 개의 부캐를 만들어두고, 부캐의 능력이 필요할 때 부캐를 소환해서 활동하다가, 때로는 부캐와 본캐를 분리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데요.
제가 뭔가 잘하는 게 있어도 스스로 뿌듯해하다가도, 그건 제가 잘하는 게 아니라, 제 부캐가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제가 뭔가 못하는 게 있어도 스스로 절망할 게 아니라, 그건 제가 못하는 게 아니라, 제 부캐가 못하는 거라고 규정짓는 것이죠. 겉으로 보기엔 살짝 책임회피 같이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치고, 의욕을 잃어서 번아웃 증후군이 와버리면 제게 주어진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은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인데요. 이 드라마는 제가 좋아하는 유튜버인 침착맨의 드라마 광고 리뷰 영상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드라마의 도입 부분을 보면, 박해준 배우가 점심시간에 갑자기 맛있는 것이 먹고 싶다면서 맛집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나가서 혼자 식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사에서 급한 업무 때문에 연락이 왔지만 전화를 받지도 않았죠.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무능한 모습에 초점을 맞췄지만, 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직장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해당 영상에서 김풍 작가는 [에난티오드로미아]라는 심리학 용어를 설명해주는데요. 이 용어는 칼 융이 언급한 말인데, 한 힘의 과잉이 필연적으로 물리적 균형과 마찬가지로 반대편의 힘을 만들어내는 원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뭔가 말의 정의가 살짝 복잡한데 그냥 예를 들어 쉽게 말하면, 사람이 갑자기 멘탈이 나가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 도입 부분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던 이해 안 되는 모습이 딱 이 용어에 걸맞는다고 볼 수 있죠.
마음이 다치지 않으려면, 일단 본캐부터 부캐와 구분하여 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부캐가 잘한 것과 못한 것을 놓고 본캐가 책임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치 회사의 CEO가 회사의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하 직원이 벌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앞으로 여러 개의 부캐를 키울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 본캐는 그 어떤 특징도 갖지 않게 되겠죠. 제 본캐가 특징이 없는 무색무취의 존재가 된다면,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게 될 겁니다. 문득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런 무색무취인 본캐를 가진 사람이 상황에 맞게 자신의 부캐를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빨리 소환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을 갖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하면 하나의 능력, 특징, 직업으로 평생 살아왔던 평생직업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영역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부캐의 탄생/발견/양육은 필수 불가결한 영역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