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많이 했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마치 제가 대단해서 성공한 것인 양 생각했었고, 반대로 누군가를 설득하지 못하면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스스로를 지켜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무지했나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제 이야기에 설득이 된 건 제가 가진 논리가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제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걸 몰랐죠. 듣는 사람이 마침 고집을 꺾을 만큼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비슷한 종류의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지 제가 설득을 잘했기 때문이 아닌 겁니다. 게다가 생각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당연하고요.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사람은 일부 변질될 수는 있어도 본질/기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저는 앞으로도 아마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종종 다른 사람이 변화하도록 설득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상당히 모순되지 않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심지어 저도 다른 사람이 말한다고 해서 생각을 바꾸지도 않으면서 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할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저도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는 [권력의 쾌감]이 크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해 볼 뿐인데요. 이게 조금 나쁘게 보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인 가스라이팅 개념과 연결되긴 하는데요. 어쩌면 제 안에도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권력은 인간이 추구하는 3대 욕망인 돈/명예/권력 중 하나인데, 권력이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손쉽게 설득해 내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설득되진 않지만, 5명의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 스스로 설득돼서 뭔가 변화를 시도해보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설득하는 에너지가 들어가야만 사람이 변화하는지에 따라 [고집도]를 수치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고집도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설득이 있어야 변화가 생기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나름의 지표로서, 제가 만들어낸 말인데요. 사람마다 설득력이 다르고,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한 지표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개념이 있다고 했을 때, 대충 자신은 어느 정도로 설득되는 사람인지 얼추 가늠하는데 도움이 되겠죠. 고집도는 서로 모르는 N명의 사람으로부터 1:1로 대면해서 말했을 때 설득될 경우, (1 - 1/N )×100 (%)로 결정됩니다.
100명에게 똑같은 말을 들어도 설득되지 않는 당신, 당신은 상위 1%의 고집을 가진 사람이군요?
저처럼 서로 모르는 다섯 명의 사람이 말하면 설득되는 사람은 80%의 고집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1 - 1/5)×100 = 80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좋은 제안을 말할 때 듣자마자 바로 혹하는 사람이 있죠. 일명 귀 얇은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귀 얇은 사람은 0%의 고집도를 가진 사람이겠죠. 왜냐하면, (1 - 1/1) × 100 = 0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100명의 사람이 말해야 겨우 설득되는 사람은 99%의 고집도를 가졌을 겁니다. 왜냐하면 (1 - 1/100) × 100 = 99이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죠. 똑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삼인성호에 낚이는 사람은 66%의 고집도를 가졌을 테니 꽤나 높은 수치군요.
거리를 걸어다니다 보면 종종 거리에서 전도하시는 분을 볼 때가 있는데요. 저렇게 전도하는 사람은 아마 스스로 사명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전도하고 있을 겁니다. 저런 형태의 전도 방식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냥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한 명이 말하는 건 흘려들을 수 있지만, 여러 명이 말하면 분명히 효과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저런 형태로 전도하는 것을 볼 때 가성비가 안 나오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편의점보다 더 많은 교회의 존재를 모르면 간첩일 테니, 차라리 썩어빠진 교회를 개혁하자고 운동을 벌이는 게 좀 더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의 정체
고집도는 가치중립적이라 생각합니다. 높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라 낮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죠. 다만 이런 고집도의 개념을 갖고 있다면, 누군가를 설득할 때 다음 세 가지를 감안해서 말하게 됩니다.
첫째, 제 이야기가 아무리 설득력이 있어도 듣는 사람이 고집도가 높다면, 절대 설득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제 이야기를 듣고 설득되었더라도, 제 말에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고집을 마침 꺾을 때였던 겁니다. 셋째, 제 이야기를 듣고 설득되었더라도, 불편함이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물론 저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설득되길 바라진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저 누군가를 설득할 때,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짚어주면서 잔소리를 하거나 선택을 강요하진 않죠. 저도 잔소리를 싫어하는데, 제가 설득하기 위해 잔소리하면 얼마나 상대방이 싫겠습니까. 저는 그저 놓여있는 문제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보여줄 뿐입니다. 물론 이런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답답한 상황에 놓여있는 당사자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마지막에 덧붙이죠. [소유]보다 [존재]가 우선이라는 사실을 주지 시키면서 말입니다.
최대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선택은 당사자에게 다시 맡겨두는데요. 이렇게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됩니다. 고집도가 높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죠. 그럼 이제 이 사람이 설득되려면, 제가 계속 붙잡고 앉아서 설득하는 건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더 고집을 꺾지 않으려고, 고집도만 더 높이게 될 뿐이죠. 누군가를 설득할 때 필요한 노력은 그저 도와달라고 할 때, 무엇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지만 짚어주면 충분합니다. 이 사람의 고집을 꺾어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이 사람이 스스로 고민해보고 고집을 꺾을 때까지 시간을 갖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처럼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죠. 이래서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에서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라고 노인이 말씀하시면서 뜸을 들였나 보죠.
3. 아는 것은 힘, 모르는 것은 약, 모든 것은 운
위와 같이 저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써 가면서 노력하지만, 예전과 달리 더 이상 설득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고집도]라는 개념을 장착한 채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도 제 고집을 꺾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데, 제가 무슨 근거로 다른 사람이 가진 고집을 꺾어야 하겠습니까. 인생은 원래 각자도생, 각자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뿐입니다. 스스로 불편하면 자기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알아서 바꾸겠죠. 그저 누군가 도와달라고 하면 무엇이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지만 짚어주고 무엇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만 짚어주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오지랖일 뿐인 데다가 효과도 별로 없죠. 대부분 몰라서 안 바꾸는 게 아니라, 스스로 불편하지 않거나 아직 덜 불편하니까 바꾸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이렇게 결과에 연연하지 않게 마음을 바꾸니까, 제 삶의 스트레스가 확 줄어드는 걸 느꼈습니다. 설득하려고 하는 제 심리상태에 안정감이 찾아오게 되니, 오히려 분위기가 좋아졌는지 상대방이 더 잘 설득되는 경우도 있었죠. 그러니까 역시 아는 것은 힘이고, 모르는 것은 약이며, 모든 것은 운입니다. 누군가를 설득할 때 고집도의 개념은 아는 게 힘이 되고, 설득된 사람이 향후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르는 게 약이 될 것이며,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생각보다 보잘것없으니 모든 게 운 인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