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짝사랑하는 건 마음속에 그 사람을 담아두는 것이다. 짝사랑은 갑자기 불현듯 찾아온다. 누군가는 금사빠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왜 금사빠인지 알 수 없다. 사랑에 빠지는 건 교통사고와도 같다. 그래서 사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7:3, 5:5를 나누다가 어느새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짝사랑의 감정은 반드시 연애의 결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거절당하는 두려움이 싫어서 고백을 망설이는 청춘들이 얼마나 많던가. 짝사랑의 결론이 반드시 성공과 실패로 나눠지지만은 않는다. 은은하게 그 짝사랑을 이어가는 모델이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팬덤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이다. 팬덤과 종교의 존재만으로도 누군가 짝사랑하는 감정 자체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짝사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세상에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로 나눠지지 않는다. 성공한 것도 아니고, 실패한 것도 아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게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 짝사랑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감정 자체가 본인에게 행복감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짝사랑은 충분히 존재 증명을 한 게 아닐까.
짝... 사랑하세요? 누구나 한 번쯤 누군가를 짝사랑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늘 구애만 받았기에 누굴 짝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비록 제가 오래 살진 않았지만, 단언컨대 [짝사랑]의 경험은 [인생을 논할 자격고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평생을 고통으로 점철되어 살다가 어느 날 훅 찾아온 순간의 [행복감]이 그 고통을 잊게 해주는 과정이 무한 반복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무한 반복되는 고통의 과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나만의 노하우를 익혀나가는 게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참맛이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모든 사람의 인생이 이렇진 않을 겁니다. 돈 많은 부자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고통이 일반인에 비해 덜 하긴 하겠죠. 그래도 나름 각자만의 고통은 있겠지만 말입니다. 짝사랑은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고난인데요. 짝사랑을 강렬하게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과 아직 저는 [인생]이란 주제를 놓고 함께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 정도로 서두에 판을 깔아놨으면, 이제 짝사랑을 해본 적 없는 분은 전부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을 보는 여러분은 제가 말씀드린 [인생을 논할 자격고사]를 모두 통과하신 분들일 테니까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을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 제가 한번 과감하게 시작해 봅니다.
아참,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기지만, 이번 글에서 저는 제가 경험한 짝사랑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이 글은 어디까지나 짝사랑의 [총론]을 다루고자 하니, 재미는 조금 없을 겁니다. 혹시나 짝사랑이란 단어를 보고 심장이 두근두근하며 기대했던 분께는 미리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기대하시는 짝사랑에 대한 한 개인의 [각론],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건 없다
1.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그건 중매 결혼이에요
짝사랑만 하다가 끝난다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왜 자신은 눈을 씻고 봐도 짝이 없을까 싶죠. 주변을 둘러보면 너도나도 핑크핑크에, 러브러브 모드에 사람 환장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짚신 입장도 들어봐야 합니다. 짚신 입장에서는 솔찬히 스트레스거든요. 짚신도 짝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크기가 맞는 짚신 두 짝을 적당히 붙여준 것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적당히 비슷한 수준의 두 사람이 중매해서 결혼한 셈이니, 짚신 입장에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후문.
집에서 밥 먹다 보면 젓가락 짝이 안 맞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긴데 다른 하나는 짧다거나, 하나는 둥근데 다른 하나는 납작하다는 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서로 짝이 안 맞는 젓가락을 놓고 [짝짹]이라고 부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게는 1촌 되시는 나이 많은 여성분(a.k.a. 엄마, 어머니, 모친)이 이렇게 불렀으니, 저도 저렇게 불렀겠죠. 밥 먹을 때 짝을 맞추는 걸 유독 신경 쓰는 사람은 젓가락 짝을 어떻게든 맞춰서 식사합니다. 참고로 저는 밥이 본질이자 목적이고 젓가락은 수단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짝짹이 젓가락으로도 밥을 잘 먹는답니다.
자신의 짚신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운명론]을 믿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짝짹이 젓가락으로도 밥을 잘 먹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짝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선택론]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둘 다 맞다고 보는 입장인데요. 왜냐하면 연애는 두 사람이 맺는 배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의 성향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성향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운명론]을 수용하게 될 것이고, 성향이 수동적인 사람을 꼬시려고 한다면 [운명론]에 입각해서 설득해야 할 겁니다. 반대로 자신의 성향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선택론]을 수용하게 될 것이고, 성향이 적극적인 사람을 꼬시려고 한다면 [선택론]에 입각해서 설득해야 할 겁니다.
따라서 저는 이 두 가지를 절충하여 [결정론]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연애는 자신의 성격에 따라 결정되니, 이미 결정된 자신의 성격에 따라 자신의 미래를 받아들이는 [운명론]을 받아들이거나, [선택론]을 받아들인다고 보는 것이죠. [운명]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누군가가 자기를 [선택] 해 주길 바랄 겁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방도 우리가 만난 인연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길 바라겠죠. 상대방은 [선택]론에 입각해서 그저 선택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이 지점이 서로 다른 두 남녀가 만나서 벌이는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일 수도 있겠네요.
2.
운명과 결정과 선택
유전과 환경과 노력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 건 [유전], [환경], [노력]이 있습니다. [유전]은 이미 바꿀 수 없는 요소이고, [노력]은 나만 노력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봐야 별로 티가 안 납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바뀌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죠. 두 가지 상수를 빼고 나면, 유일한 변수는 [환경]입니다. 저는 어차피 노력할 거라면,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연애가 잘 안 되는 건, 셋 중 하나일 텐데 대부분 [환경]을 개선하지 않아서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앞서 언급한 [운명론]은 [유전]을, [선택론]은 [노력]을, [결정론]은 [환경]을 상징합니다. 그만큼 [환경]을 잘 구성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연애를 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꾸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 사람의 노력 이야기는 함부로 공개할 수 없으니 저만 알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같이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 연애하기 힘든 시대가 없죠. 모두가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지만, 이 세상에 안정적인 게 어디 있답니까? 기껏 해봐야 다들 고작 몇십 년 살다가 떠나갈 인생인데, 왜 이렇게 까다롭게 조건만 보는 사람들이 많은지요. 비록 겉으로 드러난 조건만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의 연애가 쉽진 않아 보였지만, 어떻게든 연애하고자 환경을 바꾸는 노력을 불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이 목표한 바를 언젠가 해내리라 믿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지요.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3.
열 길 물 속은 안다고 해도
한 길 사람 속 모르는 이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고,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라고 쓰고 착각이라고 읽는)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집니다. 그토록 죽고 못 살던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웁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싸우는 걸 상당히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다들 연애해 봐서 아시겠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싸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겉사람과 속사람이 다르기 때문이죠. 요즘 말로 표현해보자면, 겉사람을 부캐, 속사람을 본캐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죠.
겉으로 드러난 부캐만 보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모르는 본캐를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결혼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결혼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본캐라고 생각했던 속사람까지도 알고 보니 또 다른 부캐였다는 얘기까지도 듣곤 합니다. 즉, [사회생활용부캐], [연애생활용부캐], [결혼생활용부캐]를 거쳐서 아이까지 낳아 기르게 되면, 비로소 서로 [본캐]가 드러나는 모양입니다. 사람 하나 제대로 알아가는 게 생각보다 참 어렵네요.
정리해 보면 물질적 자아, 육체적 자아, 사회적 자아로 불리는 [겉사람부캐]에 속아서 연애를 시작하고, 이상적 자아, 정신적 자아로 불리는 [속사람부캐]를 나름 연애를 하면서 다 알았다고 착각해서 결혼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요. 자신의 속사람을 얼마든지 겉사람으로 꾸며댈 수 있으니까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르겠다는 건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서로를 [더] 알 수는 있어도 영원히 [다] 알 수는 없다는 말이 딱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4.
겉과 속은 다르니
호출만 잘 되도록
사람이라면 겉과 속이 똑같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데요. 저는 매사에 겉과 속이 똑같아야 한다는 말에는 반대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가정에서의 자아, 사회에서의 자아 등 여러 가지 상황적 자아가 주어져 있죠.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게 왜 잘못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말처럼 상사에게 욕먹은 걸 못 참아서 부하직원에게 화풀이하면 안 되겠죠. 따라서 겉과 속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속사람을 영원히 숨길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인데요.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순 없는 법입니다. 속사람을 매번 드러낼 필요까진 없지만, 속사람을 드러내야 할 상황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드러낼 수 있을 정도는 될 수 있게 스스로 속사람을 자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내 [속사람]을 온전히 용납받는 순간이야말로 저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서로 [용납] 받는 느낌이 왜 행복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보면, 평생을 함께 할 든든한 [깐부]가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생 혼자 사는 거긴 합니다만, 적어도 등을 서로 맞대고 이 세상의 난관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아군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서로의 등을 맞대는 깐부 모델에 가장 적합한 게 [부부]라고 생각해요.
서로 등을 맞대고 세상과 맞서는 우리의 부모님
5.
겉을 치장하는 만큼
속도 돌아보게 되길
저는 누군가의 겉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습니다. 물론 누군가 겉으로 드러난 조건이 훌륭하고, 예쁘고 잘생겼으며 인기가 많다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돈이 많다면, 더할 나위 없이 당연히 좋겠죠. 그런데 그게 그 사람의 [속사람]에서부터 흘러나온 매력과 조건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에게 원래부터 주어져 있던 [겉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제 입장에서는 그런 겉사람의 모습은 잠깐 동안 매력을 느낄 순 있어도 오래 가진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신이 3루타를 친 줄 알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죠. 부모가 번 돈이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 인양 으스대는 사람은 정말 꼴 보기 싫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만나면 속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속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 사람이 쓰는 [글]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말]보다는 [글]이 누군가의 속사람을 좀 더 쉽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카톡으로 짧게 쓰는 수준의 [글]이 아니라 진득하게 앉아서 오랫동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글이야말로 속사람을 드러내는 좋은 도구가 될 거라 생각해요. 자신의 속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오늘부터 자리에 앉아서 진득하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쭉 한번 적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글을 처음 쓰면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지 않지만, 글을 계속 쓰다 보면 어느새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등장하기 마련인데요. 이렇게 속사람을 자주 마주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는 과정에서부터 인간은 성장하여 성숙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숙이란 겉사람과 속사람 사이의 괴리를 줄여나가는 과정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만일 이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겠죠. 진정한 성장을 꿈꾼다면, 자신의 외면을 치장하는 만큼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일에도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
짝사랑에 빠졌던 순간
교통사고를 당한 느낌
짝사랑 얘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앞서 좀 더 큰 이야기인 [사랑]과 [결혼]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사실 결혼도 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조금 이상할 수 있겠습니다. 직접 경험한 것만큼 강렬한 가르침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꼭 직접 경험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게, 그렇게 따지고 들면 예수님도 결혼하지 않으셨으니, 예수님께 결혼과 출산을 논할 자격을 물을 수 없겠죠. 마찬가지로 스님도 주례사를 할 수 없을 테고요.
제가 [결혼]에 대한 얘기를 가져온 이유는 바로 [짝사랑]을 얘기하기 위해서였죠. 알고 보니 서로 짝사랑했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짝사랑은 이렇게 한쪽에서 혼자 좋아하다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사랑에 빠지려면 누군가 먼저 짝사랑에 빠지긴 해야 하니, 짝사랑은 사랑을 시작하는 전 단계에 놓여있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짝사랑에 빠지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인 이유로는 [겉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이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겠죠.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을 통해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니까요.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사람을 놓고,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라고 부릅니다.
짝사랑이 안타까운 이유는 한 사람은 이미 상대방과 설계할 미래까지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겉사람]을 사랑함을 넘어서 그 사람의 [속사람]까지 보고자 애를 쓰는데,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은 피드백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절망감만 가득하죠.
착각과 망상의 끝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짝사랑은 보통 [연애]의 시작으로 이어지거나, [거절]의 아픔을 겪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경우, 이 짝사랑은 제3의 결말로 이어지게 됩니다. 바로 [지속] 가능한 짝사랑, [덕질]입니다. 소위 덕통사고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연예/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팬이 스타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저 누군가를 좋아해서 짝사랑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왜 사고라고 부르는 걸까요. 자신이 가진 부족함을 상대방으로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7.
진화한 짝사랑의 결과
확대된 아이돌의 범위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봤냐? 너희들처럼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 데에도 대접받는 것은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팬들한테 잘해야 한다.
_ 최희암, 연세대학교 스타 농구선수들에게 가한 일침 中
스타가 팬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놓고 생각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분이 있죠. 농구대잔치 시절 연세대학교 감독으로 유명한 최희암 감독이,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 등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스타 농구선수들에게 1990년대 초반 일침을 가했던 이야기입니다.
초기 팬 문화는 스타를 향해 보여주는 일방적이고 어설픈 짝사랑처럼 보였지만, 최근 보여주고 있는 팬 문화는 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속 가능한 [짝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인데요. 당시, 팬이란 스타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어쩌면 일방적인 짝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팬들이 아이돌에게 쏟는 애정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연예/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팬들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구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팬의 사랑은 일방적인데, 스타는 피드백이 없으니 둘 중 하나로 그 모습이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응이 없는 상대방을 향해 자신의 짝사랑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스타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스토킹 하는 사생팬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예전 아이돌 스타들 중에서는 팬들과 일부러 거리를 두는 사람들도 있었죠.
반대로 피드백이 없는 스타보다, 피드백이 있는 무명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소속사들이 만들어낸 스타들을 팬들이 좋아하는 형태였다면, 이제 내 스타는 내가 키운다는 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팬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 BTS야말로 팬덤 ARMY가 먹여 살린 그룹이라고 할 수 있죠. 그들의 노래/댄스가 엄청난 것도 인기의 요인이 되었겠지만, 그들의 시작부터 계속 지켜주던 팬덤이 없었다면 현재의 위상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요즘은 팬이 직접 키우는 연예인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최근 아이돌 한 사람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상의 주인공은 아이돌 그룹 여자아이들의 [미연]이었습니다. 사실 이 영상을 보기 전까지 저는 이 아이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는데, 이 영상을 보면서 [미연]이 상당히 매력적인 아이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노래/댄스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팬들을 챙기고 생각하는 [인성]까지 갖춰야 팬들이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상은 [안녕자네] 시리즈물 중 하나인데요. [안녕자네] 시리즈는 [아이돌]과 [팬의 부모] 사이에 벌어지는 신경전을 담고 있습니다. 팬이 아이돌에게 쓴 편지를 읽으면서, 팬의 부모가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못했던 표현을 읽을 때 서운한 모습을 내비치면 [아이돌]이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이 영상의 주요 연출입니다. 살짝 예비시부모님, 예비장인장모님을 뵈러 가는 듯한 느낌인데요. 그만큼 [아이돌]과 [팬]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를 일반적인 사랑으로 재해석한 형태로 구성한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짝사랑, 관계, 소통, 교육 등 다양한 주제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이돌에게 덕질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미연]에게 푹 빠지게 될 뻔하기도 했죠. 이런 매력이 있어서 팬들이 한번 사랑에 빠지면 헤어 나오질 못하겠구나 싶었죠.
아이돌은 자신의 일인 노래/댄스뿐만 아니라 외모/인성 관리까지 해가면서 점점 더 완벽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현실에서 이런 아이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곤 만무하겠죠. 그래서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일정 나이가 지나서 [아이돌]을 사랑하는 마음을 접어버리거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자아]와 [현실 애인/배우자를 사랑하는 자아]로 쪼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팬부캐]의 개념이 탄생하는 것이죠.
8.
진화한 짝사랑의 결과
확대된 아이돌의 범위
팬덤 문화의 대상은 아이돌 스타뿐만 아니라 점차 스포츠 스타, 방송인, 정치인을 넘어 일반인까지 영역을 확장합니다. 심지어 연예인 같은 일반인을 연반인이라고 부르고, SNS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인플루언서까지 생겨나고 있는데요. 아이돌(idol)은 다른 말로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저는 우상의 범주가 연예인에서 시작해서 점점 확장되어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 마음속에 들어있는 [짝사랑]의 마음이 점점 커지면 우상화되고, 이 우상화된 모습이 더 커지면 종교로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종교계의 양대산맥인 부처님, 예수님도 그 시대에서는 당대 아이돌 스타였던 셈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_ 성경, 요한복음 3:16
기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요 맥락은 사랑입니다. 그것도 보통 사랑이 아니라, 엄청난 수준의 짝사랑을 설명하고 있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얼마나 많이 짝사랑하셨던지 자신의 독생자마저도 희생 제물로 바쳤을 정도였는데요.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많이 짝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쓰신 것을 놓고, 예수님 입장에서 많이 서운해하셨을 것 같습니다.
사랑은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가 매우 깊어진 상태로써, 그 둘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최대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죠. 하지만 결국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을 겁니다. 예전에 한번 설명했던 유리수와 무리수의 예시인데요.
루트2를 아무리 유리수 범위로 [이해]하려고 해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리수로 루트2에 가까워지는 근삿값을 표시할 순 있어도 절대로 루트2를 유리수로 표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끊임없이 의심하다가 어느 순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옵니다.
하지만 무리수를 용납하는 순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의 체계가 유리수에서 실수로, 복소수로 확장될 수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설명이 가능한 [논리]의 영역에서 [감정]의 영역, [믿음]의 영역, [사랑]의 영역으로 넘어가려면 자신만의 [무리수]를 누군가가 용납하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반대로 나 역시 상대방의 [무리수]를 용납할 수도 있어야겠죠. 그래야만 상호 간의 진실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떤 사람은 [무리수]를 용납하면서 태어나기도 하는데요. [질투의 화신],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의인화]가 되었다던지 하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무래도 타고난 모난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만의 무리수를 찾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서로에게 덜 상처 내고, 성숙한 관계로 이끌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팬덤 문화에서 찾은
인간 내면의 종교성
아이돌 [팬덤] 문화를 관찰하다가 발견한 [짝사랑]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통해 [종교성]까지 쭉 한번 연결 지어보았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던 [짝사랑]의 개념을 아이돌 [팬덤] 문화에 연결시키니, 왜 그렇게 10대 팬들이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왜 뒤늦은 나이에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지도 알 수 있었죠. 인간 내면에는 부족함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늘 존재하고, 시대에 따라 대상과 시작하는 시기가 다를 뿐 모두가 내면에 갖고 있는 불완전성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제가 감히 팬덤 문화와 종교 문화를 모두 다 이해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왜 그렇게 스타에 열광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지난 짝사랑들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지난 짝사랑들에게 보였던 어설프고 과도한 애정의 표현은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것 역시 과거의 [나]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하고 스스로 용납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며 관심을 보내는 일, 때로는 [짝사랑]으로, 한편으로는 [팬심]으로도 표현됩니다. 그 사랑의 마음이 곧 우리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임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감정은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애]라는 원하는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거절]이라는 상처로 마음이 다친다면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짝사랑이 진화된 모델인 팬덤과 종교를 보면서, 짝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짝사랑의 감정을 언젠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나 스스로를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알 수 없는 [짝사랑]을 받기도 하고, 언젠가 상대방이 알아주게 될 내 [짝사랑]을 기다리기도 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