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한국어 제자들
2009년 어느 봄날.
토요일이라 방 저쪽 구석에서 이쪽 구석까지 뒹그르르~ 뒹그르르르~를 반복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한심함에 동네 서점이라도 가야겠다 싶어 막 집을 나서던 길이었다. 큰길 건널목에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외국인이 말을 걸었다. 어눌한 한국어로
“교보문고 어디 있어요?”라고
“네? 교보문고?”,
“저기 보이는 건물 지하에 있어요”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듯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대답해 주었지만 내 머릿속엔 이미 동남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이 외국인에게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저 지금 교보문고 가는데 저 따라오세요” 이렇게 배운 사람답게 대답하고 짧은 영어로 대화를 이어 갔다. 교과서에서 인이 나게 배웠으니 “웨얼알유프롬” 정도야 뭐, 짧디 짧은 영어로 몇 마디 대화를 이어가다 이 친구는 ‘오포’에 있는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인 ‘아드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 짧은 대화 속에서도 영어를 참 잘하는 게 아닌가. 서점까지 걸어가며 또 “유얼 잉글리시 이즈 구우~웃”이라며 칭찬해 주었더니 “암 잉글리시 티쳐 인 방글라데시”라고 새로운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로 친구가 된 이 아드난은 한국어를 몹시 배우고 싶어 했고 마침 다니던 교회에서 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한국어 강좌가 있어 소개해주며 나도 몇 번 봉사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토요일 오후 아드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한국어 교사가 안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봉사자로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내가 너무 부족하단 생각에 한국어 교사 자격증 공부를 하다가 대학원도 가게 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또 한 명 나의 한국어 공부에 불을 지핀 소녀가 있다.
이름은 아니타 송.
아니타를 처음 만난 건 아니타가 14살 때였다. 2014년도 봄, 서초동 상가건물 3층에 있던 북한이탈 청소년 대안학교 ‘다음학교’에서 아니타를 처음 만났다. 북한이탈 청소년 대상 대안학교였지만 중국에서 온 교포자녀들도, 고려인아이들도 함께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처음 한국어 자원봉사 수업에서 만난 아니타는 함께 학교에 다니는 다른 고려인 남학생들 3명과 함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 학생들은 고려인 후손이었고 외모는 한국사람이었지만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하지만 한국에서 대학을 가고 싶어 안산에 있는 고려인 키부츠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었다. 내가 하는 자원봉사는 한국어 수업과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이 아이들에게 국어 입시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초급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아니타를 비롯한 이 아이들이 직유법, 은유법 이런 용어를 외워야 하는 입시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세 명의 남학생들은 포기했고 아니타만 남았다. 아니타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해서 승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소녀였고 아주 똑똑해서 듣고만 자란 한국어를 놀라운 속도로 습득해 갔다. 하지만 이년 뒤에 비자 연장 문제가 해결이 안 돼서 결국 검정고시를 못 보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되돌아 갔다.
매주 수요일, 성남에 있는 학교가 끝나면 검정 비닐 봉지에 담긴 김밥을 우걱우걱 먹으며 아니타를 만나러 가던 길이 생각난다. 그땐 무슨 힘이 나서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내가 꽤나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꼬마 숙녀는 지금 다 커서 우즈베크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꿈이었던 승무원은 못 되었지만 선생님 덕분에 한국어 배워서 고맙다고 가끔 인별 그램으로 연락도 주고받는다. 나 역시 아니타에게 고맙다. 너를 그때 만나지 못했다면 선생님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니가 나를 기뻐해 주었기에 버틸 수 있는 날들이었어.
교사는 학생들에게서 에너지의 8할을 얻는다. 나를 좋아해 주고 기뻐해 주는 학생들이 있으면 막 신이 나고 힘이 난다. 성경에 ‘어떤 사람은 교사로 삼으셨으니 서로 섬기는 것을 가르치려 함이라.’라는 구절이 있다. 사랑을 배우고 겸손을 실천하고 학생들과 함께 배우는 선생의 삶은 축복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