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내린 눈은 그칠 기색이 없고 버스도 감감무소식이다.
‘걸어가야 하나?’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삼십 분 거리이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넉넉히 걸어 다녔는데 눈이 오고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걷기로 마음먹고 걷기 시작한 지 몇 미터 가지 못해 눈에 눈이 들어간 건지 찬바람 때문인지 눈물이 흐르고 마스크 입김에 금세 눈썹이 얼어붙어 눈이 잘 안 떠진다. 물론 내린 눈이 바람에 훅 날리면 난생처음 보는 눈가루가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황홀경을 만날 수 있는 ‘눈의 왕국’이 펼쳐지지만, 오늘은 풍경을 즐기기엔 너무 춥다. 한국에서 야무지게 챙겨 온 긴 패딩점퍼에 털모자를 쓰고 패딩 모자를 그 위에 또 쓰고 목도리로 둘둘 감고 현지인다운 완전무장을 하고 발목을 한참 넘게 푹푹 빠지는 눈길을 뽀드득뽀드득, 패딩의 서걱서걱 대는 소리와 내 숨소리를 견디며 겨우겨우 한 걸음씩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이걸로는 부족해요. 선생님.”
“여기 눈도, 비도 많이 오니까 이 신발이 필요해요.”
“아, 그래요?”,“아~ 이런 신발을 사야겠네요.”
학당 지원 요원 카롤리나 선생님이 내 눈에 젖은 검은 운동화를 보더니 안쓰러운지 자신의 신발을 보여주며 종아리 넘는 신발을 꼭 사라고 한다. 리투아니아에서 겨울을 나려면 꼭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눈, 비에도 끄떡없는 방수 점퍼랑 그리고 군화처럼 생긴 긴 부츠이다. 워낙 비가 많이 오고 흐린 날이 많아선지 이곳 사람들 여간한 눈,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군화처럼 생긴 부츠, 처음엔‘리투아니아 여자들이 왜 모두 군화를 신고 다니지? 이게 요즘 유행인가?’ 궁금했지만 이젠 그 신발이 없이는 여기선 겨울을 날 수 없음을 알기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파견지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길을 못 찾고 흔들리며 공중에 몇 시간째 떠서 비상착륙을 기다리는 비행기 같은, 불안한 나를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것은 매번 학생들이다. 이 학생들의 아낌없는 사랑이 나를 여기서 더 열심히 살게 한다.
뭐랄까, 한국어 교사는 파견지에 도착과 동시에 처지가 바뀌는 것 같다. 한국에서 만나는 학습자들에게 한국어 교사는 교사이자, 일종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데 비해, 혈혈단신 자신들의 나라에 한국어를 가르치겠다고 찾아온 한국어 교사는 이 학생들에게 돌봄의 대상이며 사랑을 베풀어줘야 할 약자가 되는 것 같다.
수업 시간 중에 띄엄띄엄 리투아니아어로 칭찬의 말을 건네고 예문에 리투아니아 음식을 넣어 수업 준비를 해온 한국어 선생님이 고마웠는지 학생들이 메시지를 보낸다.
“선생님, 이 차가운 수프(šaltibarščiai)는 리투아니아 전통 수프예요.”,“꼭 먹어보세요.”
“선생님, 쿠치우카이(kūčiukai)를 추천해요.”,“크리스마스 때 먹는 전통 쿠키예요”저마다 번역기를 돌려서 혹은 배웠던 한국어를 총동원해 예쁜 사진과 함께 자신들의 문화를 소개해 주고 있다. 한국어 선생님이 추위를 잘 견디고 있는지 걱정이 되는지 ‘긴 장화를 어디에서 몇 퍼센트 세일하고 있어요’라고 따끈따끈한 정보를 보내는 학생들도 있다.‘저도 선생님이랑 같은 Jeruzele 동네에 살아요. 그 동네에 조금만 걸어가면 궁궐이 있어요.’,‘산책하실 때 심심하시면 연락해 주세요’ 등등 학생들의 다정한 말 들에 밖에는 여전히 눈이 쌓이고 있지만 내 마음속 불안함은 봄눈 녹듯 녹는다.
이번 학기 수료식이 끝난 날이었다.
온라인이지만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동료 선생님들과 마음을 다해 꼼꼼히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생각지도 못했던 실수들도 있었고 한 학기 동안 함께 수업한 학생들과 헤어진다는 마음에 아쉬움이 가득한 날이었다. 또 다음 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동료 교사의 송별 파티도 할 겸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자고 동료 선생님들과 서둘러 정리하고 나오던 차였다.
동동 싸매고 학교 건물을 막 나섰는데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선생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 에글레”
같이 수업을 들었던 예바, 코트리나와 함께 에글레가 있었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리러 왔어요”
이번 학기에 세종1에서 만난 학생들이 선물을 들고 이 추운 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선생님한테 문자를 보내지~” 추운 날씨에 떨었을 학생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쓰러웠다.
“깜짝 파티를 하고 싶어서요.”
“아우 너무 고마워요.”
“선생님 선물이에요. 그리고 고마워요”
학생들이 건넨 선물에는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리투아니아 전통 빵과 초콜릿, 그리고 리투아니아 국기의 배지가 들어있었다.
“이거 너무 고마워서 어쩌지?”,“함께 사진이라도 찍자”며 급히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이대로 돌려보내기가 너무 아쉬웠다.
“선생님이 오늘 다른 선생님들이랑 약속이 있어요. 우리 다음 주에 만나서 맛있는 거 먹는 거 어때요?”
그래서 이 세 명의 귀한 아이들과 약속을 잡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코트리나가 시내 Lukiskes 공원에서 세시 괜찮아요?라고 연락이 왔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뭘 함께 먹지?’ 벌써 마음이 두근거린다. 나에게 지속적인 설렘을 선사하고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귀하고 아름다운 나의 학생들, 한국어라는 큰 우주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반짝이게 하는 존재들임을 알기에 더 다정하고 유연한, 겸손하고 품위를 잃지 않는 한국어 교사로 살아가고자 한다. 내 기억 속에 나를 가르쳤던 따뜻한 선생님들의 말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나 또한, 그리고 나의 말들은 이 학생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르침의 자리는 늘 위중하다. 한국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가고 기뻐하며 잠잠히 응원하며 함께 성장하는 한국어 교사의 자리는 축복의 자리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