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담훈 (Jung Dam-Hoon)
9화. 은둔고수 (隱遁高手)
隱遁高手는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나 있으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통달한 사람을 뜻합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깊고 단단한 실력과 존엄을 지닌 사람.
세상과 거리를 두되, 스스로의 세계 안에서 빛나는 존재.
화장실에 들어선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익숙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장 끝 칸.
항상 그 자리로 간다.
그곳엔 불필요한 시선이 없다.
세상의 중심에서 한 칸쯤 비켜난,
조용한 안식처처럼.
그는 말한다.
그냥 익숙해서요.
가장 구석이 제일 깨끗하잖아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모두가 구석이 가장 깨끗하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곳이 제일 더러울 수도 있다.
모두가 같은 판단으로 같은 공간을 선택하는 순간,
그 공간은 더 이상 ‘피난처’가 아니다.
그건 단지 ‘집중된 착각’의 결과일 뿐이다.
이건 마치 모두가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우회도로를 따라가다
오히려 그 길이 가장 막히는 현상과 비슷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똑같은 자리를 향해 걷고 있다.
결국, 구석은
깨끗해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사람들을 그리로 이끌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그런 핑계쯤은 준비해 두고 산다.
그러나 구석을 택하는 그 마음엔
익숙함보단 두려움,
청결보단 불신,
무관심보단 피로감이 배어 있다.
시선에 피로한 사람들은
항상 외곽을 택한다.
그들이 바라는 건 사라짐이 아니라,
잠시라도 비껴 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구석을 택한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는 것처럼 걸어가지만,
사실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 설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다.
가장 외진 자리엔,
가장 조용한 절망이 깃든다.
그들은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니라,
시선이 닿을까 봐 스스로를 접는 것이다.
구석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상처 난 마음을 숨기는 퇴각선이다.
그곳에서라면,
덜 들키고, 덜 흔들리고,
잠시라도 자신의 존재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중앙은 너무 밝고,
너무 많은 것이 걸린다는 것을.
그 자리는 늘 경쟁이고, 비교이고, 노출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석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지킨다.
구석은 패배가 아니라, 선택된 은둔이다.
누군가에겐 퇴각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겐 마지막 자존이다.
그들이 구석을 택하는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이 무너졌을 때
등을 기댈 벽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소변기 앞은 더 본능적이다.
누군가 옆에 설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생긴다.
그 긴장은 말이 아니라
몸의 반응으로 먼저 온다.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본다.
‘그는 나보다 큰가?’
‘더 위쪽에서 흐르고 있는가?’
‘그의 존재가, 나보다 더 분명하게 울리는가.’
그 짧은 시선 안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숨어 있다.
비교는 순간이고,
자존은 오래 흔들린다.
누군가는 그 시선에
자신의 가치를 담아내고,
또 누군가는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자신을 숨긴다.
그 공간은 마주 보지 않지만,
서로를 가장 본능적으로 의식하는 곳이다.
보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보는 그 짧은 눈짓 하나에,
우리는 스스로를 가늠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한다.
그 시선은 단지 옆을 보는 게 아니라,
나를 확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칸막이 화장실 안에는
또 다른 종류의 침묵이 흐른다.
그들은 변기를 닦고 또 닦는다.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를 지우듯.
닿는다는 건 불편한 일이다.
심지어 사람의 흔적조차
너무나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떤 이는 발로 물을 내린다.
어떤 이는 변기 위에 올라가
그 위에 앉는다.
직접 닿지 않겠다는 몸의 언어.
그건 위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신뢰의 문제다.
이 세상 어느 표면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피곤하고 날 선 확신의 발끝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원한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공간.
화장실은 그 유일한 장소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제 몸을 내려놓고,
제 마음을 감춘다.
보이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너무 많은 것에 이미 닿아본 사람들이다.
너무 많은 말에 상처받았고,
너무 많은 시선에 흔들렸고,
너무 많은 오염을 겪었다.
그래서 이제는
비켜 앉고,
조용히 내리고,
자신만의 거리를 지키며
존엄을 버티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진 칸.
그곳은 가장 적막한 회복의 자리이며,
가장 깊은 침묵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러니 다음에,
누군가 가장 구석진 칸으로 걸어가는 걸 본다면
이렇게 생각해도 좋겠다.
그는 겁쟁이도, 예민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진 날엔
가장 조용한 곳에서 자신을 지키기로 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은둔고수라 부른다.
당신은 오늘,
어디에 자리를 정했는가?
✒️ 정담훈 (Jung Dam-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