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세상

놀이터의 기억

by 정담훈

늦게까지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문득 바람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혼자 깨어 있다는 감각,

그 조용한 고립감이 문득 마음을 움직인다.
그날도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문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면 바로 마주하는 곳, 동네에서 가장 큰 놀이터.
밤공기가 퍼진 시간인데도, 그곳은 여전히 생생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네는 느리게 흔들렸고, 먼지 낀 미끄럼틀엔 아이들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모래 위엔 낮보다 더 선명한 발자국들이 흩어져 있었다.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러시아어였다.
처음엔 낯선 언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이 동네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낮에도 밤에도, 어디서든 들리는 소리.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익숙하고, 의식하지 않아도 마음에 남는, 이곳의 또 다른 언어가 되었다.

여기가 정말 한국이 맞나 싶다가도, 그래, 이제는 이게 한국이구나 싶기도 하다.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져도 괜찮은 건지 그조차도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는 밤.


아이들은 그런 경계에 관심이 없다.
한국 아이들이 부모의 눈을 늘 의식하며 노는 것과 달리,
이 아이들은 누군가의 손이 닿지 않는 무경계 속에 놓여 있다. 방임처럼 보일 만큼 자유롭고,

그 안에서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더 쉽게 부딪히고, 더 자주 다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그들만의 질서와 생존의 감각이 자란다.
아이들에게 놀이란 허락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은 그 어떤 어른보다도 삶을 통과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지금 함께 뛰고 있고, 지금 웃고 있으며, 지금 살아가고 있다.


온종일 놀이터를 떠나지 않는 아이들 곁엔, 어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림도 데리러 옮도 없는 밤, 그들의 부모는 어디에 있을까.

처음엔 그 공백이 무서웠다.
‘왜 아무도 없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안다.
그 빈자리는 무책임이 아니라, 생존 때문이라는 걸.
어른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도 일하고, 혹은 일자리를 찾아 사라진다.
돌봄은 생계에 밀리고, 보호는 가난 앞에서 후순위가 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에게 말하는 대신, 세상이 먼저 말을 건다.

“네가 견뎌야 한다.”


아이들의 시선은 오직 놀이터뿐이었다.
누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말을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구와 함께 뛰놀 수 있느냐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그 아이들은 한국에 온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한국어가 잘 늘지 않는다.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끼리 놀고 생활하기 때문인지, 말보다 몸짓이 더 빠르고, 눈빛 하나로도 충분히 통한다는 듯 그들만의 언어로 하루를 채워간다.

고장 난 자전거를 질질 끌며, 슬리퍼 하나만 달랑 신은 채 이 골목 저 골목을 종일 떠도는 아이들.
해어진 반바지, 손때 묻은 셔츠

하지만 눈빛은 맑고 단단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밥은 먹었을까.
지금 몇 시인 줄은 알까.
혹시 오늘 하루,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었을까.

처음엔 걱정이 앞섰다.


‘누가 저 아이들을 돌보는 걸까?’
‘이건 방치 아닌가?’
‘부모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하지만 더 오래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건 단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을 뿐이다.

한 아이가 넘어졌지만 울지 않았고, 옆 친구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누구도 달려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고 있었다.

그건 무심함이 아니라, 삶의 강도를 먼저 겪어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내성이었다.
이 땅이 그들에게 고향이 아니기에, 그들은 자녀를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견디는 존재로 키운다.


우리는 아이가 울기 전에 안아준다.
넘어질까 봐, 다칠까 봐 먼저 손을 뻗는다.
놀이터에서도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지켜보며, '조심해', '위험해'를 습관처럼 외친다.
그것이 보호라고 믿는다.

아이들은 울음을 스스로 그치는 과정을 통과한다.
그 기다림은 훈육이 아니라 신뢰다.
넘어져도 곁을 주시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
눈물을 스스로 삼킬 줄 알게 하려는 듯, 아이들은 그 기다림 속에서 독립심을 배운다.
우리는 계속 곁을 지키는 것을 사랑이라 말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신뢰 속에서 자란다.


심리학자 다니엘 시겔은 말했다.

"아이가 안정 애착을 느끼는 순간은, 누군가 곁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나는 괜찮아’라고 느끼는 감정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애착을 ‘돌봄’보다 ‘신뢰’ 속에서 체득한다.
함께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멀리 있어도 믿는 법을 아는 것.
그게 아이들이 배워가는 사랑 방식이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보다 먼저
함께 자라는 법을 안다.
넘어지면 손 내밀고, 싸우면 웃고, 울다가 웃는다.
그들은 감정을 밀어내기보다, 함께 흘려보낼 줄 안다.

아이 하나를 키운다는 건, 그 가정의 문화 하나가 자라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땅에 살아도 삶의 리듬은 다르고, 사랑의 방식도 다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하는 건 아이를 지키는 기술이 아니라, 아이를 이해하는 태도다.


놀이터는 작은 세계다.
국경 없는 언어가 흐르고,

지켜보는 어른의 침묵이 철학이 되며,

존중이라는 심리적 울타리가 자라난다.


나는 그 밤의 놀이터에서 배운다.
한 아이를 지켜보며, 나는 내 안의 부모 됨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사랑은 가까이 붙드는 손만이 아니라,

놓아주는 눈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Written by 정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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