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워시, 보디샴푸, 보디솝 혹은 샤워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물건에 대해 말해 보자면 사실 나는 이 보디워시를 내 돈 내고 사본 적이 없다. 이 무슨 세상 더러운 소리냐...? 부모님과 살 때는 부모님이 구비해 놓으신 걸 쓰고 살았고, 내 살림을 시작하면서부터도 사실 엄마가 명절 때면 선물로 들어오는 보디워시를 몇 병이나 챙겨주셨기 때문에 그걸 쓰기 바빴다.
그마저 다 쓰면? 그냥 비누를 썼다. 화장실에 제품이 많이 놓여 있는 게 어쩐지 싫어서 가급적이면 비누로 세수도 하고 몸도 닦으려 노력한다. 가끔 비누로 머리까지 감는다. 나는 저렴하면서도 두루 쉽게 구할 수 있는 도브 비누를 쓰지만 비싼 브랜드에서도 올인원 비누를 많이 내고 있다. 비누를 쓰면 플라스틱 용기 사용도 줄어들고 그 용기에 끼는 물때도 없고 여러모로 좋다. 그러다 보면 또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보디워시가 들어오고...
지난겨울 내 생일이었다. 예전에는 - 예전이 대체 언제적인지 이제는 햇수를 세기도 힘들다 기억도 잘 안 난다 - 친구 생일 선물을 사서 만날 때 주거나 받곤 했는데 이제는 생일 선물이 전부 카카오톡 기프티콘으로 대체되었다. 생일 선물도 '생선'이라고 부르고 사실 이마저도 벌써 한물 간 표현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친구가 보디워시 세트를 보내주었다. 받을 때는 별 생각 없이 고맙다고 하고 받았는데, 집으로 온 걸 뜯어보니 하얀 상자에 감색 리본으로 장식이 된,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세트가 있었다. 상자를 여니 얇은 종이에 싸인 용기는 더욱 세련되어 보여서, 나는 그걸 어쩐지 꺼내들기가 싫었다. 어쩌면 누군가 다른 이에게 선물을 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보디워시를 잘 안 쓰니까. 이렇게 좋은 건 딱히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있을 때 이 매끈한 상자와 함께 주면 좋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그걸 다른 사람에게 줄 일은 없었다.
보디워시의 선물로서의 위치가 뭐랄까 조금 애매한 면이 있다. 굉장히 실용적이면서 너무나 개인적이기도 해서 이걸 선물해도 될 정도의 사람인지 판단하는 데에 신중해져야 할 것 같다. 카카오톡 기프티콘으로 받을 때와는 영 다른 느낌이다. 피부에 직접 닿는 제품이니 피부와 안 맞을지도 모르고 향이 강한 제품이니 향을 싫어하는지도 모르겠고 또 오래된 얘기이긴 한데 서양 사람들은 이런 제품을 선물로 받으면 '혹시 나한테서 냄새 나? 그래서 이런 걸 주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혹시 내가 집에서 일만 하는 사이에 요즘 젊은이들은 서양 사람들처럼 생각하게 됐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자칫 이 선물은 애물단지가 될 수도, 실례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예민한 선물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내 방 한쪽에 놓여진 하얀 그 상자를 쳐다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보디워시와 보디로션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두 개를 모두 꺼내 로션은 안방에, 워시는 욕실에 가져다 두었다. 보통은 샴푸나 기타 등등의 제품을 그냥 바닥에 놓아두는데, 이건 통이 작아서 허리를 굽혀 쓰기가 힘들어 세면대 위에 올려두었다. 군더더기 없는 모양에 투명한 플라스틱 통이 어쩐지 욕실을 조금 멋지게 만들어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몸에 물을 묻히고 샤워타월에 보디워시를 펌핑해 거품을 냈다. 두 손 가득 약간 헐렁한 느낌의 거품이 일었다. 이런 향기를 뭐라고 하더라? 시더우드? 아무튼 나무 계열의 향이 났다. 엄마가 준 보디워시는 죄 플로럴 향이었는데 어쩐지 향도 멋진 느낌이 든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뒤 이번에는 세트의 보디로션을 발랐다. 역시 비슷한 나무 향이 났다.
고등학생-대학생이던 무렵 미용실이나 병원에 가면 <쎄씨>(세씨? 쎄시?) 같은 잡지가 있었다. 젊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여 패션, 화장품 등을 추천하고 젊은 여성이 가져야 할 태도 등을 전파하는 매체였다. 거기에 나오는 옷과 액세서리 들은 항상 내 생각보다 비싸서 잡지를 뒤적여도 크게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없어 지루했는데 그래도 여성이 응당 갖춰야 할 교양이라며 길게 써내는 기사들은 재밌는 읽을 거리였다. 그중 하나였다. "보디워시와 보디로션을 같은 향으로 통일하세요. 그러고 같은 향의 향수를 살짝 뿌린 침대 위에서 자요. 그러면 그 향이 마치 내가 타고난 향기처럼 나에게 스며들 거예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렇게 향을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제품을 구매하고 그걸 쓰고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의 향으로 만드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 그런 사람은 얼마나 교양이 넘치고 향기롭고 우아할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렸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그런 잡지가 나를 코르셋에 가두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향을 선택할 수 있는 삶이 부럽기만 했다. 문득 연예인 조세호 씨가 자기는 잘 때 속옷만 입고 좋아하는 향수 뿌리고 잔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아니 생각하지 말자.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그것도 내가 고른 것도 아닌 제품이지만 이제서야, 보디워시와 보디로션의 향을 맞추었구나 싶어 웃음이 난다. 이제는 이런 것이 나에게 그 어떤 허영심도 그 어떤 만족감도 주지 못한다는 게 더더욱 우습다.
아마 내가 쓰는 다음 보디워시는 역시 명절에 엄마가 장롱에서 꺼내주는 선물용 세트에 들어 있던 제품이겠지? 대체 엄마한테는 얼마나 많은 보디워시가 들어오는 걸까? 왜 계속 나오는 걸까? 요즘에는 명절 선물세트도 다양하게 나오던데 이번에는 엄마 장롱에서 보디워시가 안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