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코인 Mar 25. 2022

바닥 닦기로 동료에게 힘주는 능력

: 월급과 비례하지 않는 값진 능력

(ps. '대체로 가난해서' 매거진에 참여하기 위해 이전에 쓴 두 편의 글을 하나로 묶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원본>

바닥 닦기로 동료에게 힘 주는 능력(1) (brunch.co.kr)

바닥 닦기로 동료에게 힘 주는 능력(2) (brunch.co.kr)





  어느 날 내 책상 아래에 어머님 한분이 들어가 계신 걸 목격한 것은 평소와 다름 없는 오후 근무 시간의 일이었다. 그때 내 자리 주변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한 공간 안에서 근무하는 선임과 팀장 모두 수요처를 방문 하러 나가 있었다. 나 또한 1층 사무실에 잠시 서류를 전하러 갔다 오느라 자리를 비워 두었던 참이었다. 계단을 올라 다시 3층으로 들어선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걸까. 더 다가가지 못하고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상황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의외로 내 자리가 침범당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상체를 움직이는 어머님에게 머물러 있던 시선이 의자와 컴퓨터 책상으로 구성된 내 자리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면 문 앞에 서서도 훤이 보일 만큼 사실 '내 자리'는 '자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공간이긴 했다. 벽은커녕 어떤 칸막이도 없이 사방이 뻥 뚫려 있었기 때문에 사실 누구나 지나가면서 기웃거릴 수 있을 정도로 접근하기 편했다. 3층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친해지라는 복지관 측의 의도가 반영된 자리 배치는 아니었다. 복지관의 사회복지사들과 다르게 내가 속한 전담인력팀이 따로 사무실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일하게 될 공간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의 그 실망감을 잊을 수 없다.





  복지관 건물의 3층 문을 열고 들어오면 눈앞에 긴 복도가 펼쳐져 진다. 복도를 기준으로 왼편에는 두 개의 프로그램실과 회의실이 일렬로 자리해 있고, 오른편에는 각종 비품들을 쌓을 수 있도록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공간들이 블라인드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데, 양쪽 모두 전담인력들이 일하는 공간은 아니다. 전담인력들의 자리는 왼쪽 회의실 벽면 앞, 그러니까 3층 복도 한쪽에 덩그러니 위치해 있다. 벽면에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지원 사업 접수처'라는 현수막을 테이프로 붙여 놓고, 그 아래 컴퓨터 책상들과 의자들을 갖다 놓은 자리가 바로 전담인력들의 근무 공간이었다.


  아무리 하는 일이 단순 반복적이고, 덜 중요하다고 해도 건물 안의 수많은 방들 중에서 하나도 내주지를 않다니. 자격지심이긴 하지만, 복지관 안에서의 낮은 서열을 물리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뻥 뚫린 공간에 있다보니 3층 방들을 이용하는 사회복지사들과 주민분들, 장난감 등의 비품을 가지러 오는 유치원 선생님들, 건물 안을 청소하시는 노인일자리 어머님들이 지나갈 때마다 눈이 마주치는 것도 문제였다. 자리에 앉아 문서 작업을 하고 있으면 많게는 하루에 오십 번도 넘게 인사를 해야만 할 때도 있었다. 워낙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내 자리에 초록 앞치마를 두른 노인일자리 어머님이 접근해 계신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절하는 자세로 몸을 깊이 숙여 내 책상 아래로 들어가신 어머님의 모습은 좀 낯설었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알게 된 것은 움직임을 멈춘 어머님이 마침 고개를 들어 올리고 나서였다.


  "아이고, 선생님 왜 아무 소리도 없이 와요. 놀랐잖아요."


  그 어머님은 건물 청소하시는 어머님들 중에서 유일하게 내게 존댓말을 쓰셔서 처음 기억에 남았던 분이셨다. 나와 다르게 평소에 내 옆자리에 앉은 40대의 여자 선임과는 서로 말을 놓으며 잡담을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간혹 나와 선임에게 인삼맛 캔디를 나눠주시거나 내가 간혹 깜빡하고 잊은 퇴근 전 창문 닫기며 소형 냉장고 물 채우기 등의 당번 일을 도와주실 때도 있어서 나도 감사하게 생각하곤 했다.


  "어머님, 저도 놀랐어요. 거기 왜 들어가 계시는 거예요?"


  어머님은 손에 들고 계시던 철수세미를 보란듯이 들어 올렸다.


  "청소하다가 보니까 여기 큼지막한 얼룩이 하나 있길래 선생님 없을 때 빨리 닦으려고 들어갔죠."


  그 말을 듣고 나니 어제 비슷한 시간에 어머님께서 청소하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혹시라도 방해될까 봐 책상 밑으로는 밀대 걸레를 집어 넣지 못하고, 잠시 고민하시다가 언저리만 열심히 닦으시던 모습이.


  "근데 이게 암만해도 안 지워지데요. 철수세미로 이제 겨우 다 닦았어요."


  노고가 느껴지는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짠한 마음도 들고, 어머님께서는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도 늘 진심으로 청소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같은 공간을 쓰는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아아, 그러셨군요. 열심히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혹시라도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 많이 쉬면서 하시면 좋겠어요."


  "나이 든 사람이라고 걱정해주시니까 고마워요."


  "제가 사업 담당자는 아니지만, 정말 쉬엄 쉬엄 하셔도 괜찮으세요.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어머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근데 저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손바닥만한 얼룩이 자꾸 눈에 거슬렸는데 다 닦고 나니까 후련해요."


  얼룩을 열심히 닦은 것 때문에 후련함을 다 느끼시다니. 열심히 일하고 남을 돕는데 보람을 느끼는 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왠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전담인력으로 일하면서 이렇게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깨닫게 된 듯했다. 그 순간에 자각하진 못했지만, 아마 평소에 일하면서 힘든 적이 많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사실 단순 반복적인 업무가 많았기 때문에 일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사회복지 현장에서 유명한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치인다'라는 말을 처음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쭉 체감했던 것 같다. 내가 담당하는 노인일자리 어르신들 중 극소수의 떼쓰는 분들에게 치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주로 상사들에게 치이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더 큰 문제였다.


  암만 생각해도 책상 위에 필기도구가 많이 올려져 있다는 이유로 '집에서도 정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어딜 가나 티가 나지. 조만간에 가방 검사라도 해서 교육 시켜야겠어.'라고 엄포를 주거나 엑셀에서 특수문자 하나 찾지 못한 것 때문에 '자격증 다른 사람이 대신 따준 거 아니야?'라고 구박하는 팀장의 말을 납득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이념으로 내걸은 사회복지관 안에서는 물론이고, 인격을 가진 사람 앞에서도 당연히 써서는 안 되는 말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평소에 관장에게 받은 질타를 내리 갈굼으로 전하려 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구내 유료 식당에서 만났을 때 부장이 종종 했던 말들도 좀 지나쳤던 것 같다. '생선 많이 먹지 마라. 너 때문에 뒷사람들이 많이 못 먹잖아.' '넌 하루에 몇 끼 먹냐. 아침 안 먹고 여기서 다 떼우는 거 아니야?'라고 했던 말들도 마찬가지로 서러움을 느끼게 할 만큼 폭력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동료에 대한 '예의'나 '배려'라는 능력만 놓고 생각해 본다면 상대적으로 기관에서 지위도 높고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두 상사가 청소하는 어머님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것 같다. 두 상사 모두 청소하는 어머님한테 한참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은 '146배의 능력 차이'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칼럼 내용도 떠오른다. 제목 속의 '146배'는 전관예우 등의 문제로 과거에 감사원장 후보직에서 사퇴한 정동기 후보의 떳떳하지 못한 월급 1억 1000만 원과 비슷한 시기에 해고된 홍대 청소 노동자들의 75만 원 월급을 비교한 수치다. 평론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차이가 146배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라고 글의 말미에서 말한다.


  글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자기 월급을 얼마든지 올릴 수 있는 고위직들의 문제와 무관하게 단지 그 문장만 놓고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능력의 정당한 대가로 인식되는 월급이 인간의 능력 차이를 제대로 반영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월급이 인간의 능력 차이를 제대로 반영해 내지 못하는 것처럼, 직장 내의 다른 동료들을 배려해서 행복감을 전하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그 중요한 능력 또한 월급이나 지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한 달에 27만 원을 버는 어머님이 한 달에 300, 400만 원 이상 버는 내 상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너그러웠던 것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반비례하는 것 같기도 하다. 6개월 만에 전담인력 알바를 그만둘 때까지 어머님과 더불어 나를 도와주시고 배려해주셨던 분들이 주로 나와 같은 계약직 분들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그건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간혹 내게 안부를 물어봐 주시고, 점심시간에 함께 탁구 할 수 있도록 불러주시고, 무거운 박스를 날라주셨던 그분들의 관심이 동료나 상사들의 가르침보다 내겐 더 소중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퇴사한 마당에 기억 속에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들도 그분들이 내게 따뜻한 마음으로 전한 말과 행동들인 것 같다. 수없이 채찍으로 치다가 어쩌다가 한 번씩 당근으로 길들이려고 했던 상사들의 영혼 없는 칭찬의 말들은 아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스무 살의 은둔형 외톨이와 화해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