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준가 Jun 09. 2017

43일

바보와 세화




한동교회는 한동리 버스 정류장에서 한동리 상동으로 올라가는 길, 골목 안쪽 깊이 있다. 큰길에서 보면 어느 골목으로 가야 도착하는지 헷갈릴 만큼 굽이진 골목을 지난다. 교회 건물은 주변의 집들과 같이 어떤 예고도 없이 자리에 있다. 돌담도 보통의 제주 집들과 같다. 다만 다른 집보다 약간 큰 건물에 첨탑이 있을 뿐이다. 돌담 아래에 유난히 꽃이 많이 피어 있고, 그 앞으로 잘 가꾸어진 텃밭이 딸려 있다. 한쪽에는 오래되고 지저분한 미끄럼틀이 있고 그 옆에 누렁이 한 마리가 억울한 표정으로 매어 있다. 

교회를 나와 내리막을 조금 내려가면 동법사가 있다. 작은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플라스틱 가리개로 길을 막아 놓았다. 처음엔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걸까 싶어서 주춤했는데 높이가 무릎에도 못 미치는 걸 보니 사람을 막는 용도는 아닌 것 같다. 가리개를 넘어 들어가니 한옥으로 지어진 작은 법당이 보인다. 법당 안에는 작은 금색 불상이 있었다. 녹음된 불경 읽는 소리가 은은히 흘러 나왔다. 법당 바로 앞에 무기력해 보이는 작은 개가 묶여 있었는데 나중에 찍은 사진을 보니 그냥 줄이 옆에 있을 뿐, 매여 있지 않았다. 입구의 가리개는 이 개를 위한 것 같다. 법당의 옆으로 그리고 뒤로 현대식 건물이 두 채 있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무나 행사를 보는가 싶다. 작은 마당에는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 석등이 있었다. 법당의 옆으로 돌아가니 탱화 세 점이 그려져 있다. 법당에 올 때는 탱화를 찾아보는 게 나름의 재미가 되었다. 그런데 탱화 옆으로 벌이 지나치에 많이 모여 날고 있었다. 벌집이 있나. 으, 벌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벗어나야지. 

바다 쪽으로 걸어서 오늘은 바보 카페(풀네임은 바다가보이는 카페)에 갔다. 나름대로 여행객이니까 동네의 다른 카페도 가 봐야겠다 싶었다. 공간은 밖에서 보던 대로 벽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맛은 좀 시었다. 카페에서 커피 주문할 때 커피 맛에 대해 미리 좀 알려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바보 카페는 한동리 바다 바로 앞에 있어서 카페 의자에 앉아 바다를 감상하기 좋다. 여차하면 일어나 길을 건너 바다로 갈 수 있다. 예쁜 언니들이 예쁜 원피스를 입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간이 뻥뻥 뚫린 때문일까, 분명히 그늘에 있는데도 눈이 시려서 선글라스를 자꾸 썼다가 벗었다.



나에게는 있으나마나한 공지..



커피를 다 마신 뒤 세화리의 분식집에 가려고 일어났다. 나는 호떡을 좋아하는데 이곳에는 무려 이름이 호떡분식인 가게가 있다. 동네 언니가 맛있다는 제보를 해주셔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정류장에서 웬 지프차가 서더니 호빵맨을 닮은 아저씨가 어디까지 가냐고 물으셨다. 세화에 간다고 했더니 타라고 하셨다.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타는 건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인데 어쩐지 인상이 너무 푸근해서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차에 탔다. 차의 계기판 옆에는 '제주지방검찰청'이라고 적힌 신분증이 놓여 있었다. 검찰청 직원이라고 해서 딱히 안심할 사항은 아니지만 최소한 신원 확인을 했으니 손톱 만큼 마음이 놓였다. 아저씨는 바닷가에 사시는데 역시 세화에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세화의원 앞에서 내려 호떡분식으로 갔다. 호떡분식은 문이 닫혀 있었다. 태워준 아저씨가 저만치서 무슨 일이냐고 하셔서 손으로 엑스자를 그리며 문을 닫았다고 알려드렸다. 인사를 하고 나는 다른 식당을 찾아 떠났다. 아무 일 없이 세화리까지 편하게 오게 되어 다행이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P언니와 가려고 했지만 문을 닫아 못 갔던 서울국수가게에서 순두부를 먹으려고 했는데 순두부는 2인분 이상만 주문이 된다고 해서 포기했다. 재연식당은 1인분 주문이 가능해 많이들 가는 것 같은데 어쩐지 백반은 당기지 않았다. 지난 번 장날이라 못 간 PO세화에 갔더니 방역 중이라며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이쯤 되니 너무 더워져서 결국엔 읍사무소 앞 가야밀면에 가서 냉밀면을 먹었다. 맛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시원한 맛에 잘 먹고 나왔다. 

뭔가 구경하고 싶어서 나나이로에 가는 길이었다. 다모아물류센터가 보여서 잠시 들어갔다가 황도 통조림과 햄통조림을 사서 나왔다. 늘 가던 하나로마트보다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왜 진작 여기 와볼 생각을 못했지? 최근에 밖에 나가는 날이 많아 일부러 장을 덜 보고 있는데, 아직 일정이 며칠은 남았으니까 이런 간단한 반찬은 언젠가 먹겠지 싶었다. 나나이로에서는 아주 작고 귀여운 화분 모양의 뱃지를 샀다. 뱃지도 좋지만 그 화분과 식물의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화분을 키우고 싶다. 한편 떠나온 육지의 집에서 화분 하나가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미안, 잘 가렴. 몇 년 간 내 곁에서 살아 남느라 고생 많았다.  

버스 여행자의 발과 다름 없는 701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버스가 저만치 오는 걸 보고 분명 앞으로 나와 있었는데도 나를 그냥 지나쳐 갔다. 조금 더 가서 섰길래 뛰어가서(발목 아파) 타려 했더니 할머니 한 분이 내리고 계셨다. 그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냥 버스를 놓칠 뻔했을 것이다. 왜 내 앞에서 안 섰을까, 그 기사님 분명히 날 봤는데. 

집에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집안 청소를 했다. 내일은 각자의 가족들이 오기로 한 날이다. 유는 동생이, 나는 엄마, 언니, 조카 둘이. 징검다리 연휴라 다들 시간을 내 온다. 그래서 우리의 기록은 여기까지로 한다. 가족들과 지내다 보면 조용히 앉아 기록하고 그리는 시간은 내기 어려울 테니까. 이제 가족들과 갈 곳을 정하고 맛집도 알아 놓고 충실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을 보내야지.




타는 쓰레기는 이렇게 밭 구석에서 태우는 일이 많다.





이전 17화 42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