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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먹진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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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가 Jun 17. 2022

양배추 누들 스프

추웠다. 갑작스럽게 하늘에 잔뜩 끼어버린 구름 때문일까. 여름이 오는 5월 말이었지만 방안에는 한기가 가득 찬 것 같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추운 겨울이라면 방안에 가득찬 한기를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다마는 따뜻하다 이따금씩 추워지는 여름날의 서늘함은 그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따뜻한 물을 연거푸 마셔도 무언가 모자란 것 같았다. 따뜻한 점심이 필요했다. 한입만 먹어도 따뜻하고 든든해서 속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은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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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냉장고의 속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있는 것이라곤 전날 요리를 해먹고 남은 양배추 반 통과 감자 몇 알, 채소 스톡 뿐이었다. 나도 냉장고도 속이 텅텅 비었다. 냉장고의 속을 채워주려 나가기엔 힘도, 의지도 부족했다. 남은 재료들을 빤히 쳐다보다 문득 떠올랐다. 양배추랑 채소 스톡으로 뭐라도 만들수 있지 않을까. 


양배추를 구워보면 어떨까. 그것도 아주 바싹. 양배추 스테이크를 하는 듯 굽되, 더 얇게 썰어 구운 면적이 늘어나도록. 표면이 눌어붙을 정도로 구운 양배추는 아주 달큰한 맛을 낸다. 도마를 꺼내고 칼을 쥐었다. 착착착. 최대한 얇은 두께로 양배추를 썰어나갔다. 길이가 어느 정도 있어 국수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애호박 파스타면이나 오이 콩국수면처럼 이제부터 양배추도 면이 될 수 있겠다. 


팬이 달구어지자 방안의 온도가 조금 높아지기 시작했다. 양배추 면이 익어가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물을 끓일 타이밍이다. 냄비에 물을 넣고 채소스톡의 반을 툭 잘라 넣었다. 페퍼론치노도 함께 몇 알 부셔 넣었다. 어째 국물이라는 것은 조금 칼칼하거나 얼큰해야 든든하게 먹은 느낌이 난다. 밑국물을 만드는 동안 썰어둔 양배추도 열심히 단내를 냈다. 동시에 익고 끓여지는 두 향이 제법 어울렸다. 바싹 구운 양배추를 그릇에 담고, 그 옆으로 만들어 둔 밑국물을 흘려보냈다. 뜨거운 국물이 양배추를 푹 익게 하지 않도록.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과연 내가 만들어 낸 것이 괴식일지 뜻밖의 행운작이 될지. 따뜻한 공기와 달큰 얼큰한 냄새가 만들어낸 훈훈함이 먹지 않아도 속을 어느 정도는 채워준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한 입 먹어보았다. 아삭하고 달큰한 첫맛뒤에 따라오는 칼칼함. 대작의 냄새가 났다. 마치 건강하게 만든 채식라면의 느낌이기도 했다. 속이 뜨끈해지니 방도 더 이상 춥지 않게 느껴졌다. 어서 일을 마치고 나가 저녁장을 잔뜩 봐와야겠다는 의지와 힘도 생겼다.


마음에 들었으니 이 음식에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바로 ‘양배추 누들 스프’. 따뜻함이 필요했던 어느 날, 반쪽자리 스톡과 반쪽자리 양배추에게 받은 위로는 이다지도 온전했다. 조리도 간편하니 앞으로도 자주 해먹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혼을 위한 나만의 닭고기 스프를 찾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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