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라, 아무도 듣고있지 않은 것처럼

<불안이 답했다> - 섭도비의 글 3

by 준가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던 그


더벅머리에 안경을 쓴 그를 기억한다. 그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주변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대학 동기들 중 유일하게 내가 그와 친했다. 그와 친해진 이유는 내가 그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사실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과 생활을 거의 안 하는 그가 아슬 누나가 있는 모임에는 매번 참석했기 때문이다. 한 학번 위 아슬 누나는 브로콜리 너마저라는 밴드 노래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누나가 추천을 해서 몇 번 들어보긴 했지만 쉽고 흔한 노래가 아니라서 그런지 나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노래의 매력을 그는 알아낸 걸까? 아슬 누나의 추천 덕분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마치 평생 브로콜리 너마저라는 밴드 노래를 들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슬 누나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날도 많아졌다. 그리고 매일 지치지 않고 그는 내게 그 밴드 아니 누나와의 대화를 이야기해 줬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면 마치 나도 그 노래를 들어야 할 것 같은 날들이 많았다.


아슬 누나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보편적인 노래'였다. 누나는 술에 취하면 이렇게 말했다.


" '보편적인 노래를 너에게 주고 싶어' 라니 너무 아름답지 않니? '너무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지만 들어줘'라며 누가 불러주면 바로 그 사람이랑 사랑에 빠질 텐데."


누나가 그 이야기를 하면 그는 늘 눈을 반짝였다. 그리곤 자리가 파한 후 나를 데리고 노래방을 갔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도비야 듣고 어떤지 좀 알려줘"


첫 가사에서 나는 알았다. 그는 음치였다. 그래도 그는 열심이었고, 고음을 질러야 하는 노래가 아니라서 그런대로 들어줄 만 하다고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했다.


"좀 더 담담하게 부르면 더 좋을 거 같은데?"


내 조언에 그는 담담하게 부르게 될 때까지 계속 노래방을 다녔다. 음치였기 때문에 그의 노래는 들을 때마다 생소해지는 포인트가 있었다. 그가 사랑을 행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될 때쯤 그의 노래에서 진심이 담담하게 담긴 순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부분을 계속 북돋아 줬다. 디데이인 MT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그의 노래는 어느새 브로콜리 너마저의 담담함에 닿아있었다.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꼭 생각이 난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노래를 시작하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그의 모습이 재생된다. 노래를 할 용기를 잃어버린 아이들 중 하나가 꼭 이런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노래를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이 노래를 시작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노래를 잃어버린다. 보편성에 노래가 묻혀 버린다. 꼭 불러야 하는 상황, 그리고 자신 없는 노래, 노래는 이쯤 되면 아이들에게 노동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떤 아이에겐 끔찍한 체벌이 된다.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때로 아이들은 스스로를 보편성 뒤편으로 지워낸다.



끝끝내 노래를 부르지 못하던 한 아이가 울어버린 경우도 있다. 내 차례가 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근두근 거림을 감당하지 못한 거다. 기대의 대열에 끌려가느니 속으로 노래를 꿀꺽 삼켜버리는 녀석들도 있다. 앞에서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시간을 견뎌내는 거다. 노래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요 작은 무대 앞에서 당황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으로 아이들을 볼 때면 꼭 그 친구가 생각이 난다. 결국 그녀와 모두 앞에서 부르진 못했지만 혼자 노래를 불러냈던 그 마음을 나는 봤다.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노래하기 위해 노래했던 순간. 잠시 그 친구를 떠올리는데 또 다른 녀석이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를 한다. 요 녀석은 자신감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오늘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은 녀석이다.



"그런 노래 없다. 다시 불러라."



아이들의 성화에 녀석은 노래를 시작한다. 내가 그때 친구의 마음을 짐짓 무시하고 '그런 노래 없다 다시 불러라'라고 용기를 줬다면 그는 노래를 불렀을까? 어쩌면 그 마음이 닿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진 순간부터 누군가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에게 슬픈 일이 됐을지 모른다.



MT날 왜 노래를 안 불렀냐는 내 물음에.


녀석은


"응. 가사를 까먹어서."


라고 했다.



나는 녀석의 마음이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잔을 마저 비웠었다.



부르지 못한 노래와 부르다 만 노래 그리고 앞으로 부를 노래에 보내는 박수



부르지 못한 노래, 피우지 못한 꿈과 사랑.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는 미완성인가? 아니면 정성을 담아 불렀다면 완성된 노래인가? 부르지 못한 노래인가? 혹은 부르다 만 노래인가? 나는 그가 부르지 못한 노래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 박수 한 번으로 위안이 될 수 없겠지만 그는 더 많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MT날 모두의 재촉에도 그가 노래를 부르지 않은 뒤로 누구도 그에게 다시 노래를 권하는 일이 없었고 그도 누구 앞에서 노래를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의 짓궂은 야유에도 꿋꿋하게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힘이 나서 웃음이 난다.



두려움에 가득 찬 상태로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을 본다. 그러면 나도 같이 긴장한다. 고음 부분에서 음이탈나면 안 되는데. 속으로 화이팅이라고 말해주고 머리 뒤끝부터 올라오는 한기를 느낀다. 나는 왜 같이 긴장과 부끄럼을 느끼나. 음이탈이 결국 일어난다. 내 마음도 같이 무너진다.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노래를 부르는 심정이 된다. 그리고 노래는 나를 그 상황으로 데려간다. 나는 결국 또 그 친구가 부르지 못한 노래를 기억한다. 불러주려 죽어라 연습했지만 부르지 못한 노래. 나만 들을 수 있었던 노래. 몇 번을 연습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는 또 다른 아슬 누나에게 그 노래를 결국 불러줬을까? 아니면 혼자 조용히 간직했을까? 모를 일이다. 그와 연락이 끊긴지도 어느새 10년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포기를 강요받는다. 인생이라는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라는 압박에 우리는 계속 좌절한다. 알게 모르게 포기는 강요된다. 멋진 노래를 불러내는 아이들 사이에 서서, 야유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르는 음치인 아이들에게 나는 더 많은 박수를 보낸다. 온전한 자신이 돼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온전한 자신이 돼서 노래를 불러내던 그가 미처 시작하지 못한 노래를 듣는 마음으로 그렇게 박수를 보낸다. 박수를 보내는데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keyword
이전 06화비오는 날 개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