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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 넘은 만년필, 아직도 펜을 들게 하는 이유

by 언덕파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초창기,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노트북도, 가방도 아니었다. 단 하나의 물건을 상상하곤 했다. 몽블랑. 어딘가 사치스럽지만, 동시에 절제된 이름. 몽블랑 만년필 하나면 왠지 카피라이터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잘 나가던 선배들은 훈장처럼, 명함처럼 만년필을 들고 다녔다. 회의 중에도, 출근길 카페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꺼내 들어 카피를 적었다. 그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그렇게 쓰는 모습 자체가 마치 광고라는 장르와 어울리는 제스처 같기도 했고, 유명 작가가 원고를 고치는 순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3.jpg 100살이 넘은 만년필, 몽블랑



그때 내게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쓰기라는 행위에, 어떤 존재감을 더해주는 도구였고 나도 언젠가는 저런 만년필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그런 ‘되었다’는 증표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까지 몽블랑을 가져본 적이 없다. 대신 날카롭고 날씬하게 디자인된 아트펜을 자주 썼고, 급할 땐 연필도 자주 썼다. 쓴다라는 행위는 펜과 상관없는 내 직업의 고요한 의식과도 같았다.



오래전 잠시 몸 담았던 회사의 대표로부터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듀퐁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만년필은 여전히 몽블랑이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굳이 종이에 뭔가를 쓴다는 건 어쩌면 시대에 뒤처진 행위로 보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타이핑에 익숙해졌고, 글자는 더 이상 '눌러쓰는'것이 아니라 '쳐서 입력하는' 행위가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종이 위에 사각사각 무언가를 쓰는 감각을 좋아한다. 글자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나올 때, 그 순간엔 머리보다는 손이 먼저 반응한다. 쓰는 것 자체가 생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내게 만년필은 늘 선망의 선물이었다. 왠지 몽블랑 만년필로 쓰면 좋은 카피가 나올 것만 같은 착각, 아니, 기대 같은 게 있었다. 제품의 블랙 실루엣이 주는 육중한 카리스마, 펜촉 끝의 정교한 디테일, 종이 위에 써 내려갈 때 느껴지는 매끄러운 촉감. 위대한 브랜드는 어느 것 하나로만 대표할 수 없고, 동시에 어느 것 하나도 허술한 구석이 없다고 느꼈다. 몽블랑은 딱 그런 브랜드였다.



우연히 잡지 <보그> 잡지를 보다가 몽블랑에 대한 글을 읽었다. 내 마음속의 만년필이 100살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Meisterstück). 1924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이 만년필은, 처음부터 일상용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요일용’. 즉, 평범한 날이 아닌 특별한 순간을 위한 도구였다. 14K 골드 펜촉은 35단계를 거쳐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 마지막 단계는 종이 위에서의 사운드 테스트. 사각사각, 부드럽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며 검수한다고 한다. 손끝에서 듣는 소리로 글의 결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디테일 하나만으로도, 몽블랑은 100살을 지나 먼 미래에도 '쓰기'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될 것이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00주년 캠페인에 등장한 루퍼트 프렌드. 사진 몽블랑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6120


100주년 캠페인 영상은 웨스 앤더슨 감독이 연출했고, 루퍼트 프렌드, 이진욱 같은 배우들이 함께했다. 촬영은 알프스의 산속에서 진행됐고, 만년필과 가방, 시계 등 다양한 마이스터스튁 라인이 고전적인 세트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들의 의도는 단순한 제품 소개가 아니라, “무언가를 남기는 도구로서의 몽블랑”을 말하는 것이었다.



기사의 마지막엔 인상 깊은 문장이 있었다. 배우 루퍼트 프렌드가 말한다.

"친필에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메일이나 메시지를 보낸다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직접 쓴 편지를 받는다면 그 편지를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읽는 순간, 왜 나는 여전히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싶은지를 잠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예전, 알파 문구에서 잉크를 사러 갔다가 문구점 사장님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년필 쓰는 사람은 왠지 있어 보여요. 예전엔 기내에서 출입국 신고서를 썼는데 만년필 쓰는 사람을 보면 왠지 달라 보이더라고요.”



몽블랑이 1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기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감’. 글을 쓰는 사람의 태도와 말투까지 기억에 남게 하는 물건, 그런 브랜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은 너무 빨라졌고, 종이 위 글씨 따윈 느리고 비효율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느린 필기를 한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그 감각이 때로는 가장 진심에 가까운 문장을 꺼내준다.



잉크병을 연다.

먹물 머금은 붓처럼 슥슥 종이 위를 누벼본다.


Mon Bl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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