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들여다 보기
카피라이터의 장난감은 널리고 널린 '단어'다.
나는 단어를 가지고 논다. 그래야 하는 직업이다.
가볍게 놀아야 할 건이 있고, 무겁고 진지하게 다뤄야 할 건이 있지만
단어 자체는 그야말로 누구나 알고 있고 아무나 내뱉는 흔한 워딩이다.
어려운 전문용어가 아닌 중학생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단어들이고,
방금 떠오른 생각이거나 머릿속을 스쳐간 짧은 기억이기도 하다.
그런 단어(정확히는 아이디어일 테지만)를 찾아 숙성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감칠맛 나는 카피가 된다.
마치 날 것의 생닭가슴살에 올리브오일을 적셔주고 향긋한 향신료들을 뿌려 에이징 하는 것처럼...
날 것의 단어들은 발에 차인다. 일상 도처에서 어슬렁거린다.
평소엔 아무 의미 없이 스쳐갔던 애들이 각 잡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시도 때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야, 네가 고민하는 거... 이거 아냐?'라고 물어온다.
점심시간 팔팔 끓는 김치찌개 안의 사리를 집어들 때, 지하철 문에 기대 음악을 들을 때,
스벅 한편에서 잡지를 넘길 때, 둥근 해가 떠오르는 새벽 중랑천을 뛰고 있을 때
대략 이런 식이다. 두서없고 난데없다.
글로벌 골프 브랜드 아디다스골프와 테일러메이드 광고를 대행할 때의 일이다.
광고주의 과제는 이랬다.
'테일러메이드가 만든 여성용 골프클럽, <글로리 라인>의 콘셉트와 슬로건 제안'
시장분석, 타깃분석, 제품분석을 차례차례 머리에 입력해 본다.
며칠 후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골프는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스포츠였다. 클럽의 무게, 디자인, 스펙, 심지어 광고 속 메시지까지도
남성 골퍼들을 겨냥해 왔다. 여성 골퍼들을 위한 장비는 단순히 ‘남성 클럽보다 가벼운 버전’ 정도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여성 골퍼들도 파워풀한 스윙을 원한다. 단순히 가볍고 예쁜 클럽이 아니라, 성능도 뛰어나면서 스타일까지 고려한 장비를 필요로 한다."
좌충우돌 고민하다가 찾은 단어 즉 핵심 키워드는 "Perforwomance"였다.
노트에 여러 워딩을 끄적이다가 함께 일하던 아트 디렉터에게 농담처럼 던진 카피였다.
"야, Performance엔 man만 있잖아. man을 woman으로 바꿔보면 어때?"
이 단순한 조작(?)으로 브랜드 슬로건도 만들었다.
“Stylish Perforwomance, 테일러메이드 글로리”
퍼포먼스의 대명사 테일러메이드가 만든 여성 클럽이라면, 다른 브랜드 보다 더 액티브하고
파워풀한 스윙을 원하는 여성골퍼일 것이다. 명분은 충분했다.
근데 클라이언트가 과연 사줄까. 미국 본사가 컨펌은 둘째치고 콩글리시라고 비웃지는 않을까.
확실한 컨펌을 위해 15초 콘티 3편을 만들어 함께 제시해 드렸다.
결과는 오케이였다.
몇 년 전에 제안했고 지금도 여전히 TV광고에 나온다.
퍼포먼스는 내게 흔하디 흔한 단어일 뿐이었다. 계속 가지고 놀며 들여다봤더니 카피가 보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아이디어는 맨땅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한 것들의 재발견이고 재해석이다.
몇 년 전 마케팅 컨설팅을 하시는 선배가 사무실을 '확장 이전'한다 해서 예쁜 난 화분을 보내드렸다.
'축 이전' 리본은 너무 흔할 것 같아 짧게 고민을 한 후 이렇게 써서 보내 드렸다.
"그 이전과는 다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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