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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향하는 것들

냄새는 우리를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by 언덕파

"냄새는 우리를 수천 미터 떨어진 곳에 많은 시간을 건너뛰어 데려다주는 힘센 마술사다. 과일 향기는 나를 남부의 고향으로, 복숭아 과수원에서 장난치던 어린 시절로 둥실둥실 띄워 보낸다. 슬며시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다른 냄새들은, 내 마음을 기쁨에 녹아내리게도 하고, 슬픈 기억에 움츠러들게도 만든다. 지금 냄새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 코는 가버린 여름과 멀리서 익어가는 곡식의 달콤한 기억을 일깨우는 향기로 가득 차다." -헬렌 켈러,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에커먼



난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루틴은 기지개를 켜는 것도, 물 한 컵 마시는 것도 아닌 간밤에 쌓였을 집안 공기를 환기시키는 일이다. 집안의 모든 창문들을 열고 밖의 냄새를 들여오고 안의 냄새를 밖으로 내보낸다. 그래서 집들이 선물을 받을 땐 주로 디퓨저를 콕 찍어 사달라고 한 적도 많다. 지금 사는 곳으로 작년 여름에 이사 왔는데, 디퓨저만 3개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는 딥티크인데, 거실에 두었더니 너무 강해서 여기저기 옮겼던 기억이 난다. 유해성분 이슈도 들어서 알지만, 약간의 향이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 바닥을 보이는 디퓨저들은 화장실로 잠시 옮겨 쓰다가 버린다.



다음은 드레스 퍼퓸. 처음엔 이런 제품이 있는 줄도 몰랐다. 우연히 세제를 주문하다 알게 된 자매 브랜드였다. 테스트 겸 구매해서 써봤는데 성분 좋고 향도 맘에 들어서 바로 구매해 버렸다. 자연스럽게 향에 대한 애착은 침구나 옷 정리에도 이어졌다. 스프레이형 제품인데, 자기 직전에 몇 번 침대와 배게 쪽으로 뿌려준다. 그래 봤자 몇 분 후면 모두 사라지고 말지만. 칙-칙- 뿌려준다. 하루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는 침구에서 자신의 채취로 퀴퀴해진 냄새를 맡고 싶진 않았다. 공기가 맑고 습하지 않은 날은 행어에 걸린 옷들 위에도 뿌려주고 있다. 특별한 옷 관리를 위해서라기보다 옷을 입을 때 눅눅한 냄새가 싫어서. 이 또한 몇 분 정도 지속하다 향은 사라진다.



다이앤 에커먼의 글을 한 번 더 인용하자면,

"냄새는 오랜 세월 동안 덤불 속에 감춰진 지뢰처럼 기억 속에서 슬며시 폭발한다. 냄새의 뇌관을 건드리면 모든 추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수많은 영상들이 덤불 속에서 튀어 오른다"



그랬던 것 같다. 냄새는, 향은 늘 기억과 함께 덮여있는 것 같다. 외할머니를 만나면 늘 할머니만의 냄새가 반가웠고 주말 본가에 들를 때도 가장 먼저 확인되는 오감 중 하나는 엄마의 김치찌개 냄새였다. 현관문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미 냄새로 확인되곤 했다. 내 차에 탔을 때 나는 늘 익숙한 냄새, 샤워를 마친 후 쓰는 로션의 냄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의 냄새, 새 러닝화 언박싱을 하는 순간 도달하는 공산품 냄새... 내 코가 개 코인 건가 싶다가도 후각의 기억은 생각보다 깊다는 걸 알게 된다.



프레데릭 말, 당 떼 브하 영어로는 in your arms. 불어 발음이 더 아트적이다.



나의 향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당연히 향수로 이어졌다. 향기 나는 종이 띠로 향수를 광고한 최초의 브랜드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였다. 요즘엔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면 종종 종이 시향 페이퍼를 나눠준다. 받지 않아도 몇 미터 전에서 이미 향은 전달받게 되고 받을지 말지는 찰나에 결정되고 만다. 많은 향수를 써왔고 맡아봤다. 향수 역시 향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그때 뿌리고 보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현재는 프레데릭 말 dans tes bras와 메종 마르지엘라 jazz club를 쓴다. dans tes bras를 쓰게 된 건 어느 리뷰어의 짧은 코멘트 때문이었다. 표현이 무척 크리에이티브했다. "아침 운동으로 땀 흘린 남자의 품에서 나는 향'이라는 유니크한 리뷰였다. 향을 TPO로 묘사한 리뷰 중에 꽤나 끌렸던 모양이다. 직접 써보고 동의했다. 호불호가 나뉠 향이었다. 난 하나의 향에 꽂히면 쭉 가는 스타일이다.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향기가 나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조이기도 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조향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던 기억이 난다. 사무실이 위치한 성수동에는 수많은 카페가 있다. 하지만 내가 자주 찾고 추천하는 카페는 커피 향 좋은 곳이 아니다. 화장실이 쾌적하고 기분 좋은 향을 제공해 주는 곳들이다. 향은 의외의 포인트에서 기억된다.



메종 마르지엘라 재즈클럽, <재즈의 계절>이라는 책을 읽다가 재즈 처럼 즉흥구매했다



냄새는 머물지 않고 날아가고 사라지지만, 한 번 스며든 기억은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다.

향은 늘 무언가를 데려온다. 계절이거나 사람이고, 풍경이거나 감정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냄새를 입고, 기억을 남기고 싶다. 나에게 향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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