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때 보이는 영감들
달릴 때 보이는 것과 걸을 때 보이는 것이 다르다. 요즘 경미한 부상이 있어 달리기 대신 산책을 많이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느린 걸음. 달릴 땐 거의 앞만 보거나 주로에 있는 사람들을 피해 가는 것에 집중한다. 가끔 멋진 일출과 석양을 목격하지만 대체로는 내 몸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된다. 온갖 잡념과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친다. 그 마저도 페이스를 올리면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달리는 동안엔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요즘 SNS를 열면 열에 여덟은 달리기 사진과 글들이다. 붐이다. 메가 트렌드처럼 보인다.
매주마다 크고 작은 대회가 열리고 참가자 수도 점점 많아진다. 그만큼 달리기에 진심이 사람들이 많아졌다. 건강도 챙기고 좋은 루틴도 만드는 일석이조다. 뛸 때는 몰랐는데 강제로 걷기를 하다 보니 이 또한 얻는 게 좀 있다. 달릴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영감들이다. 저녁 식사 후에 동네 골목이나 자주 뛰던 주로를 천천히 걷는다. 걷기와 뛰기는 속도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집을 나와 주택가 쪽으로 산책을 가던 중이었다.
'아 이 집은 정말 오래된 집이구나'
'건축 양식이 독특하네'
'내부만 리뉴얼했는데 멋진 카페네'
'와, 이 부동산은 아직도 그대로네'
'어릴 적 저 골목에 살았었는데 그 집은 없어졌네'
그렇게 집 구경, 길 구경 하던 차에 유난히 반복되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주차금지'표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동네 모든 집들 입구에 붙여 있었다. 서체도 모두 동일한 고딕이었다. "역시 고딕체는 명령조에 잘 어울리지" 하면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서울은 주차 스트레스가 정말 많은 도시구나라는 안타까움도 함께. 조금 더 걸어본다. 20여 미터 전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음악은 아니었고 반복되는 연습 소리 같았다. 더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피아노학원이었다. 근데 어디에도 '피아노학원'이란 간판이 없다. 대신 멋들어진 로고와 네이밍이 건물 상단에 걸려있다. 멋졌다. 주인장의 감각에 엄지 척을 해주고 싶었다. 저런 감각이라면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도 미학적인 자극까지 함께 배우지 않을까 싶다. 뛰어갔으면 아마 모르고 지나쳤을 것들이다.
걸으면서 좋은 건 폰을 휴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릴 땐 핸드폰 하나도 짐이 되지만 걸을 땐 나를 포토그래퍼로 만들어준다. 막 눌러댄다. 눈에 들어오면 바로 들이대서 찍게 된다. 언제든 담아 올 수 있다. 시간의 흔적을 깨닫게 되고 장소의 스토리텔링도 추측하게 해 준다. 사진은 한 편의 영상을 떠오르게 하고 영상은 인상적인 한 컷을 남겨준다. 언제는 걷지 않았을까. 매일 걷는 게 일상인데 말이다. 근데 달리기를 자주 하다 보니 흔하디 흔한 걷기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뛰었다는 기록과, 10K 완주 인증숏이 넘쳐난다. 나 역시 아침이면 러닝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거리와 심박수를 기록하며, 몸을 깨우고 마음을 단련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뛰었다. 뛰는 속도만큼 삶도 뭔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호흡은 거칠고, 심장은 바쁘게 뛰었다. 달리기의 행복은 저 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생각한다. 호흡과 두 발의 움직임 그리고
알아차림. 하지만 달리기를 멈추고 강제 휴식 삼아 걸어보니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패션스토아 미가엘이라는 오래된 이름. 과거엔 스토아라고 발음하고 표기했었다. 로고가 떨어져 나간 빌라 이름. 지역 이름이 보이면 왠지 내공이 있을 것 같은 식당들. 그 모든 것들은 늘 거기에 있었지만, 대부분 그냥 흘러갔던 것들이다. 빠르게 지나치기만 했으니까. 걷기란 거리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세상의 속도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느림은, 처음엔 어색하다. 하지만 곧 편안해진다.
숨을 헐떡이지 않아도 되고, 조급한 마음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걷는 동안은 발끝이 아니라 주변을 본다.
담벼락 위에 핀 이름 모를 꽃을 본다. 작고 낡은 의자 하나에도,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읽게 된다. 삶에도 빠른 리듬과 느린 리듬이 있다. 러닝은 내 심장을 깨운다. 걷기는 내 시선을 깨운다. 뛸 때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걸을 때는 과정을 천천히 음미한다. 누구에게나 빠른 리듬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느린 리듬 없이 삶은 금세 닳아버린다. 러닝과 워킹, 빠름과 느림. 두 리듬을 오가며,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골목 끝, 조금은 낡은 간판들, 창가에 빛바랜 화분 하나, 노란 조명이 번진 동네 카페를 지나며.
빠르게 도착하는 것보다, 천천히 발견하는 쪽을 택하면서. 뛰는 세상 속에서도, 나는 오늘, 내 걸음을 느리게 느리게 가져가본다. 그렇게 느리게 걷다 보면 달리기가 또 그리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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