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업가 정담 Sep 05. 2024

쿠데타: 대표님은 가만히 계세요

Chapter 1. Chasing the Big Breaks #6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야 할 때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늘 정공법이었다. 


다소 투박할 수는 있어도 솔직하게 패를 꺼내서 맞춰보면 가장 빨리 해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이렉트로 소통하고자 하고 직원들에게 의견이 있으면 가감 없이 얘기해 달라 했다. 


뿌연 안갯속에서 알 수 없는 미묘한 대립과 신경전들이 불쾌하게 오고 가던 즈음,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정공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분위기는 창립 이래 최악의 정치판 같았지만 전사 타운홀 미팅을 개최하기로 했다. (이 때의 회사 분위기는 끼리끼리와 카더라편 참조) 


타운홀, 또는 올핸즈 미팅은 모든 직원들이 모여 회사의 현황을 리뷰하고 아젠다를 논의하는 자리다. 기업들 중에는 의외로 매출액과 같은 대표적인 지표도 공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회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함께 사실을 공유하고 이슈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어야 건강한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당연히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서로 편이 갈리고 우리 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회사를 향한 원망이 커져가는 시점에 오히려 다 같이 이야기해 보자고 했으니 호응이 좋을 리 없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일방적인 '대표의 수업시간' 같은 시간이 되어 버렸고 피드백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오픈 토론 세션에서 문제가 터졌다. 


타운홀이 열리기 몇 주 전부터 우리 회사에는 오프라인 공간을 온라인과 연동하는 IoT에 대한 논의들이 있어 왔다. 모바일앱서비스를 출시하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아젠다였지만 문제는 기술 도입은 분석과 가설 검증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지 어느 편의 판단과 주장으로 결정될 성격이 아니었다. 다만 이를 주장했던 이들은 본인들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오픈 토론에서 갑자기 이 주제를 꺼냈다. 모두가 모여 있는 자리였고 대표가 주재하고 있는 타운홀 회의에서 의견으로 결정될 수 없는 주제를 꺼냈다. 이건 그간 담아두었던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출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곧 반대 진영에서도 반대의견을 거세게 쏟아냈다. 


다시 강조하면 본 아젠다는 의견으로 결정될 것이 아니었는데도(심지어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근거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들이 이어졌다. 대선 정책토론처럼 관전의 재미가 쏠쏠해질 때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 주제에 대한 찬반 진영이 갑론을박 속에 굉장히 명확히 드러났는데, 신묘하게도 평소에 편 가르기를 했던 사람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듯했다. 


이날 타운홀 미팅은 대표의 재미없는 수업시간으로 시작하여 사자와 늑대들의 싸움을 거쳐 사그라들지 않은 불씨를 남긴 채 끝났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수확은 얽혀있는 이해관계들이 또렷해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제 막장으로 치닫는다. 




늦은 시간 회사에서 A와 J가 이야기하던 자리에 공동창업자가 조인했다. J는 타운홀에서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고 A는 같은 당 인사라고 보면 된다. 밖에서 술까지 한잔들 하고 와서는 중요한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차마 나를 부르진 못하고 공동창업자를 부른 것이었다. 


이야기의 내용인즉슨 '우리 대표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면서 정작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럴 바에는 이야기를 들을 게 아니라 그냥 우리한테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공동창업자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더 기가 찼다. 내가 하고자 했던 투명한 소통을 마치 원하는 걸 들어주는 자리로 오해한 것은 물론, 본인들이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이니 대표님께서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기만이었다. 


그들은 정치판에서 한 당파를 차지하는 인물들이었고 둘 다 팀장이었는데 마치 이 회사를 본인들의 소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주인의식이 왜곡되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화룡점정은 며칠 후에 있었다. 양 파벌은 공개 메신저 채널에서도 서로를 비하하기에 이르렀고, J는 나에게 C를 내보내야 한다고(물론 회사를 위해서라고 했다) 주장했고 C는 반대로 J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근거 없는 비난은 지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밤 11시쯤 J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술 취한 목소리로 "정말 C를 안 내보내실 겁니까"라고 물어봤을 땐 나도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정치 소용돌이의 중심인 J와 A를 내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J가 먼저 와서 퇴직 의사를 밝혔다. 아마도 밤 11시에 술 취해서 전화했던 행동 이후로 본인도 이 회사에서 더 이상 권력을 가지기 힘들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같은 파였던 A는 그로부터 4개월 정도 후에 퇴사했다. 별개로 상대 파였던 C는 J의 퇴사 직후에, 그리고 같은 편이었던 S 또한 약 4개월 후에 내보냈다. 


그렇게 우리 회사는 조직의 절반이 바뀌는 대혼란을 겪었다.

 



정치판을 벌렸던 당파인사들의 빈자리를 업무의욕 충만한 새로운 인재들이 채우고, 유능한 HR 담당자가 건강한 문화적 기반을 닦아 나가면서 회사는 다시 차츰차츰 건강해졌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후에도 잔재들이 한동안 남아 있었고 새로운 정치 패턴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약 2년의 자정작용을 거쳐 회사는 온전히 거듭났다. 이제는 정치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역량이 뛰어난 사람들은 역량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업무능력 외 다른 행동으로 부족한 능력을 커버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대기업에서는 줄을 잘 서는 것도 능력이라고 하지만 나는 순수하게 역량으로 평가받는 조직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을 겪는 과정에서 나에게는 신기하게도 정치적 행동을 꿰뚫어 보는 심미안이 생겼다. 정치적인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냐고?


처음에 J와 C가 서로가 나쁜 사람이라고 나에게 이야기할 때 난 정말 누가 내 편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아무런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 말도 맞는 듯 하고 저 말도 맞는 듯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와서 업무와 관련 없이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고 동조를 구하면 그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사실적인 근거와 출처를 물어봤을 때 뚜렷하게 대답하지 못하면 답은 더욱 확실해진다. J와 C 모두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이 맞다. 



이런 사람들은 업무 역량이 크게 뛰어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세상 일은 다 알 수 없듯이 가끔은 큰 조직에서는 능력보다도 정치력이 더 높게 평가될 때가 많다. 어딘가에 줄을 잘 서서 승승장구하는 그런 케이스들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끼리끼리와 카더라: 출근하는 정치인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