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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업가 정담 Aug 21. 2024

인턴은 서류작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Chapter 2. The Ambitious Boy #1

스물 여섯살, 경제적 독립을 위한 나의 인생 첫 페이지는 IT회사의 인턴 시절에서 시작한다. 


지금은 사라진 기업이지만 한 때는 미국 IT업계를 주름잡던 거대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6개월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최대한 많이 직접 부딫쳐보고 경험해봐야한다는 주의였던 나는 졸업 전에 사회생활을 조금이나마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 반년 동안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로 결심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영어는 젬병이었던 나는 영어 면접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만큼 정신이 혼비백산이었다. 하지만 웬 걸, 결과는 의외로 합격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얼떨결에 합격한 나는 마케팅팀 인턴으로 다른 스무명 남짓의 같은 기수 신병들과 거친 사회생활에 뛰어들게 된다. 



인턴 생활 초기에 나는 우리 기억 속의 모든 인턴들이 하는 것들을 했다. 종이를 복사하거나 행사를 지원하거나 엑셀 데이터를 정리하는 그런 허드렛 일들이다. 나름 자세는 진지했기에 어떻게 하면 엑셀 수식을 더 멋지게 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최대의 고민이었던 것 같다. 동기들도 매일 넥타이 색깔까지 신경써서 출근했지만 정작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 띄우는 인턴이 가장 예쁨받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정말 찐한 경험은 그로부터 약 2개월 후에 일어난다. 휴직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이리스 과장님(영문이름 Iris)께서 복귀하시면서 내 멘토가 바뀌었다. 


우선 아이리스라는 예쁜 이름에 현혹되지 않길. 지금도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시지만 그 당시 과장님을 떠올려보자면 남자들도 어려워하는 여장부이시며 이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글로벌에서도 알아주었다. 보통 헤드쿼터에서의 별명은 여전사 잔다르크. 특히 푸른 눈의 본사 임원들이 한국에 출장오면 술자리에서 늘 "오 아이리스, 제발 한번만 봐줘! 더는 못 마시겠다구." 라고 도망가는 그림을 연출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분이 내 멘토로 오셨다. 


"지금까지 어떤 일 했어요?" 

"누구 차장님 엑셀 작업 도와드리고 부장님 행사 지원 드리고... 등등 했습니다!" 


"후..." 


그럴 줄 알았다는 짧은 한숨 뒤에 이어진 말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다시 한번 되묻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우리 회사가 말이지 지금까지 산학협력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이거 맡아서 한번 진행해볼래요?"


응? 무시기? 산학협력이 뭐지? 그리고 뭘(목적) 어떻게(방법) 진행해?

내 멘토의 지시사항은 딱 거기까지였다. 당시 회사는 설립한지 20년 가량 됐었고 300명 정도 일하는 한국지사였는데 마케팅 차원에서 산학협력 프로그램은 한번도 진행해본 역사가 없으니 한번 맡아서 해보라는 것이었다. 사회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인턴사원, 바로 나에게 말이다. 



하지만 난 아이리스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떠밀려 반박하기는 커녕 홀린 것처럼 어느 새 자리에서 기획안을 끄적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산학협력의 골자는 대략 이랬다. 


1. 공대생들에겐 유명한 회사지만 학생들에게 회사와 제품이 노출되는 것만으로 매출이 늘진 않는다. 
2. 하지만 이 학생들이 졸업해서 취업을 할 것이고 언젠가는 구매부서의 담당자가 될 지도 모른다. 
3. 또 매출이 아니라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4. 학생들에게 회사 제품을 노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제품을 활용하는 수업을 만드는 것이다. 
5. 수업을 만드는 것은 교수의 재량이니 교수에게는 (학교에 자랑할만한) 경제적 이득을 준다. 
6. 강사와 교재는 회사에서 준비하여 교수의 수고는 없애준다... 


오케이. 지금 생각해도 치밀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실행이 중요한 법, 도대체 어떻게 교수나 관계자를 만난단 말인가. 스물 여섯살, 아무런 경험도 인맥도 없던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무대뽀 정신뿐이었다. 



우선 전국의 대학교 리스트를 모두 뽑았다. 그리고 해당 대학교의 공대 행정실이나 학과 사무실의 이메일과 연락처를 모두 기록했다. 그 다음에 남은 건? 당연히 하나하나 모두 전화하는 것이었다.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처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 기술도 없는 나같은 신병에게는 딱 맞는 방법이이었다. 


마치 이동통신사 변경을 권하는 텔레마케터처럼 난 전화기를 붙들고 같은 멘트를 반복했고 100여 곳 중에서 97곳이 관심없다거나 회신이 없었다. 하지만 무려! 3곳에서 관심이 있다는 회신이 왔다. 맨땅에 헤딩 치고는 대단한 성공 아닌가(전환률 3%)? 그리고 그들 중 한곳은 나의 모교이기도 했기에 난 한층 더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젊음의 기운으로 무장하고 패기 넘치던 나의 걸음은 회의실 문을 연 순간부터 소심해지기 시작했다. 스물 여섯 살 인턴사원 앞에 흰머리 지긋하신 학과 교수님들 다섯 분이 근엄한 표정으로 둥글게 앉아계셨기 때문이다. 


아마 공학도의 세계에서는 이 회사가 워낙 네임드였기 때문이리라(하지만 사실 난 문과생이다). 설마 하니 그 분들도 새파랗게 어린 인턴(이라고도 말은 하지 못했지만) 사원이 혼자 올 거라고는 예상을 못 하셨나보다. 내 앉은 키가 작지않았음에도 난 그 분들이 날 위에서 90도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계획은 머릿 속에 있었지만 나는 할아버지뻘 되는 어르신들 앞에서 질문에 답도 제대로 못하고 진땀만 뻘뻘 흘렸다. 바지가 축축할 지경이다. 산학협력에 대한 기획만 있었을뿐, 제품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의사결정권한도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회의는 허무하게도 15분만에 끝났다. 글로벌 대기업이 왜 이런 어린 아이를 보냈을까 하는 어르신들의 표정이 기억에 선명하다. 당연히 이후 팔로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첫번째 좌절이었다. 모교가 안 도와준다고 원망도 잠깐 해봤지만 무서운 교수님들 얼굴이 떠오르니 그냥 빠르게 접는게 낫겠다 싶기도 했다. 




두번째 학교를 방문할 땐 오기가 생겼다. 되든 안 되든 15분보다 말은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연로하신 교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중간에 질문도 제대로 못 하시는 듯 싶었지만 난 이제 에라 모르겠다 이기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했다. 태어나서 아르바이트밖에 해본 적이 없던 나인데 별다른 영업스킬이 있었을까. 내 무기는 진심을 알아달라는 열정뿐이었다. 


어 그런데 통했다. 


며칠 후 전화를 한통 받았고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정규 수업을 개설 하자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우리는 진짜로 3학점짜리 수업을 D대학교에 개설하기로 했다! 수업은 내가 기획한대로 회사의 운영체제를 다뤘고 교재 또한 우리가 직접 준비했다. 


학교에는 회사의 워크스테이션을 기증했고 졸업생들에게는 우선적으로 면접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턴사원이 부사장님을 끌고 가서 학회장님과 어색한 악수 사진을 찍게 하고는 목표했던 산학협력 MOU도 체결했다. 악수사진은 당연히 기사로 나갔다. 무려 8개의 보도자료로. 


내친 김에 이후에 S여대에 동일한 수업을 또 개설했다. 첫 케이스가 레퍼런스가 되면서 두번째는 더욱 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학과생 대상 세미나와 취업설명회도 개최하고 이번에도 악수사진과 MOU는 빼놓지 않았다(덤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대 구경도). 


이렇게 입사한지 두 달 된 새파란 인턴사원이 두 건의 산학협력 MOU를 대학교들과 체결해냈다. 회사가 20년 간 존재하면서 해본적 없던 일을 말이다. 


이것이 일하면서 만든 나의 첫 성취였다(역시 인턴사원은 복사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이후 지금까지도 나의 모든 의사결정과 인생 행보에 근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나의 멘토였던 아이리스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회사에 인턴사원이 들어오면 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옛날에 무대포정신으로 무장한 레전드 인턴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 역시 지금도 아이리스를 만나면 술을 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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