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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업가 정담 Aug 23. 2024

서른 살의 현타

 Chapter 2. The Ambitious Boy #4

입사 3년이 지나자 이제 신입티도 좀 벗었고 나름 재미있는 직장생활로 어느덧 이십 대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대학교땐 시간은 많았지만 돈은 없었기에 가난한(?) 유흥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면 어엿한 금융권 직장인이 되자 남부럽지 않은 월급으로 본격적으로 젊음을 불태울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변태같이 치열하게 일했고 일이 끝난 저녁이면 청담과 이태원으로 신나게 놀러 다녔다. 모든 핫플레이스들은 내 손안에 있었고 생일, 미팅, 파티 등의 핑계로 매주 이벤트를 끊기지 않고 만들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는 이 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나와 동기들은 소위 '잘 나가는 여의도 증권맨'으로 포지셔닝해서 어딜 가나 폼을 잡곤 했다. 실제로 그 당시에 결혼정보업체에서 증권맨은 1, 2등을 다투던 이례적인 시절이었으니 후광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정장은 백화점에서 고급브랜드를 사거나 맞춤정장을 해 입었고 페라가모 넥타이에 옥스퍼드 구두는 허세의 완성에 필수였다. 딱 돈 좀 벌 것 같은 금융권 코스프레였다. 같이 놀러 다녔던 동기들도 행색이 비슷했는데 그래서 지금은 옷차림만 봐도 증권사나 여의도 사람(나처럼 헛바람이 든)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또 서로 누가 어떤 외제차를 샀네 누구는 뭐 타네 하면서 서로 경쟁했고 누가 누굴 만난다든지 하는 자랑도 빼먹지 않았다. 젊은 날의 혈기와 패기로 똘똘 뭉친 정확한 허세였다. 이 허세 덕분에 직장생활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영화 'The Big Short'에 나오는 것만큼 한방에 떼돈을 번 건 아니었지만 매월 든든하게 지갑을 불려주는 월급과 성과급은 마치 마약과도 같이 영혼을 잠식했다. 일하는 것도 신나는데 돈까지 이렇게 준다고?


지금도 가끔 동기들을 만나면 이 시절 만들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로 날밤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한없이 철없고 재밌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3년 정도 시간이 흐르고 쓰나미급 현타가 찾아왔다. 




3년 간의 사원 생활 후 나는 대리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통장 잔고를 들여다볼 일이 있었다. 웬만한 대기업보다 높은 연봉을 받았는데도 3년 후 모아놓은 돈이 꼴랑 통장에 3백만 원. 매월 월급의 30%만 저축했어도 5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 있었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됐지!?


사실 당시에 저축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허세 유지 한답시고 씀씀이가 항상 컸고 외제차와 같은 큰 소비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증권맨이니 남들마다 주식과 경제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고 ELW(주식워런트증권)와 같은 위험한 투자상품으로 목돈을 날려먹기도 했다. 


The Wolf of Wall Street


하지만 돈을 모으지 않아도 또 돈을 날려 먹어도 언제든 비상한 머리와 남들보다 빠른 투자기회로 만회할 수 있다는 만용으로 가득했다. 성과급으로 차도 사고 집도 샀다는 흔한 이야기들이 나에게도 해당될 줄 알았다. 쉽게 말해서 돈은 나중에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통장잔고를 열어 보니 아주 세게 현타가 왔다. 난 업무가 아닌 저축과 투자, 재테크에서는 성공적으로 성취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돈으로 모든 걸 환산할 순 없지만 이때 내가 느낀 감정은 지난 3년 간 치열하게 일했던 시간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타버린 느낌이었다. 바꿔 말하면 5천만 원을 모으기로 했다면 지금부터 꼬박 다시 3년간을 무보수로 일해야 했다. 


심한 좌절감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서울에 집을 사려면 연봉이 1억이 되고 매년 70%를 저축해도 20년이 걸린다는 계산도 해봤다. 그리고 저 앞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나의 팀장 연봉도 과연 1억이 되기는 할까도 생각했다. 여느 금융서적이나 자기 계발서에 있을 법한 내용이지만 통장 잔고를 열어보면서 직접 느낀 현타는 책에 있는 텍스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느꼈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 10년 후의 모습은 우리 팀장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우리 팀장님은 인간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이셨지만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당장 다이어리를 꺼내 들고 끄적였다. 내 나이 서른, 10년 후인 마흔 살에 이룰 것을 정하고, 서른다섯 살의 중간 목표와 올해 목표들을 적었다. 매우 간단했지만 인생의 지표로 삼기엔 충분했다. 


마흔 살 - 내 사업을 시작한다. 

서른다섯 살 - 월소득 1천만 원을 만든다. 

올해의 목표 - 부서를 이동한다, 부수입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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