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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업가 정담 Aug 22. 2024

변태 같은 신입사원

Chapter 2. The Ambitious Boy #3

첫 사표 후 2개월 간의 구직과정을 거쳐 목표했던 증권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연수원 시절은 내 인생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행복했던 시절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볼에 포동포동 살도 많이 올랐다. 어지간히 기뻤나 보지. 한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는 느낌은 나에게 안정감을 주기 충분했고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갖게 했다. 


물론 이것도 1년 후에 있을 방황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얘기다. 정말로 취업은 시작일 뿐 직장생활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이 시절 나는 시키지 않은 일을 즐겨하고 야근을 스스로 하는 변태적인 업무성향을 보였다. 패기 넘치는 신입으로서 일에 대한 욕심일 수도 있고, 인턴시절 경험했던 성취감에 대한 파블로프 효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일을 성취하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존재의 증명이라고 느꼈다. 또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멋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가성비 좋은 일꾼이었던 게 틀림없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거나 일을 벌이기를 곧잘 했는데, 내가 일했던 곳에서는 나의 그런 성향이 잘 받아들여졌다(모든 회사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상대적으로 신생 회사여서 인력구조가 젊은 편이었고 보수적인 금융회사들 중 열려있는 기업문화를 가진 몇 안 되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금융상품에 점수를 매겼던 일이었다. 회사는 2008년 금융위기 전 차이나펀드를 비롯한 뮤추얼펀드로 성장이 빨랐던 회사였는데 나 같은 신입사원이 보기에는 그 종류가 너무 많아 보였다. 어림잡아 100개는 족히 넘는 상품들이 있었다. 


증권사에서는 자사 상품뿐 아니라 타사의 상품도 판매하기 때문에 펀드의 홍수 속에서 도대체 어떤 금융상품이 좋은 건지 고객도 판매자도 알기 어려운 건 당연했다. 


가만 놔둬도 될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변태적 DNA의 소유자였던 나. 또다시 시키지도 않은 일에 몰두한다. 정규 업무가 끝나고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수백 개 뮤추얼펀드들에 점수를 매길 수 있도록 고민했다. 



정량적인 변수들 - 수익률, BM 대비 수익률, 자산총액, 변동성 등 - 에 정성적인 평가-운용사의 역량, 펀드매니저의 역량 등 - 를 더하는 그런 식이었고 그 이름도 거창한  [펀드 레이팅 시스템]이 탄생했다. 


별 다섯 개가 5점 만점으로 최우수 펀드였으며 점수가 높을수록 자연스럽게 본사에서 추천하는 펀드가 됐다.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숨긴 채 드래프트 버전을 슬쩍 팀 대리님께 보여드렸다. 취지를 설명하고 방법론을 적은 한 페이지 기획서와 펀드리스트가 나열된 결과물, 총 2페이지의 자료를 보시고는 대리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거 괜찮은데? 좀 다듬어서 전체 지점에 뿌려봐."


오. 오!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자료를 받아 들고 돌아서는 내 입술은 미소로 실룩거리고 있었고 다른 직원들이 없었다면 주먹 쥐고 "나이스!"라도 외칠 판이었다. 



그렇게 2년 차 사원의 아이디어는 결실을 맺고 150개 지점에 당당하게 뿌려졌다. 지점의 영업직원들은 해당 자료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를 찾았다. 담당자란에 적힌 내 이름을 보면 마치 훈장이라도 단 느낌이었고, 나보다 훨씬 경력이 높으셨던 과차장님, 지점장님들이 전화해서 물어볼 때면 어깨뽕이 천정을 뚫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한다고 성과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사원 레벨에서 평가가 좋아도 돌아올 건 그다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변태적으로 일했던 건 긍정적인 피드백과 해냈다는 성취감, 그로써 뿌듯함을 넘어선 아이덴티티의 형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모티베이션이란 정말 마법의 단어 같다. HR뿐 아니라 모든 조직행동론의 관점에서 단연 궁극의 목표가 아닐까 싶다. 기업에서 경영진들이 늘 하는 고민이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소위 주인의식을 가지고 내 회사처럼 성심성의껏 일하게 할 것인가' 아닌가. 실제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처럼 일하라는 올바른 메시지는 아니지만, 긍정의 모티베이션 루프는 내가 사원으로 일하면서 몸소 체험한 것과 일치한다.   


스스로의 목표 설정 - 성취 - 보상

목표 설정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보다는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좋다. 물론 스스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은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회사의 목표를 이해하고 그와 연결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해도 좋다. 


또 성취감을 느끼려면 목표가 충분히 도전적이어야 한다. 달성하기 쉬운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했다고 기뻐하는 사람은 앞으로의 성장도 그 정도에 멈춘다고 봐야 한다. 냉정하지만 회사에서도 큰 보상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보상은 물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보상이 물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었기 때문에 모티베이션이 훨씬 강력했다. 물질이 만족보다 더 큰 가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자. 돈보다 위에 있는 게 나 자신의 만족감 아니냐고. 



물질적인 것도 모티베이션을 줄 수 있지만 결코 자기 자신과 바꿀 정도로 값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급자로부터의 인정도 한몫한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역량을 평가해 줬으니 나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고 자기만족 욕구를 충족시켜 줬던 것으로 난 풀이한다. 


당시에는 스스로를 결코 객관화시켜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인턴시절의 활약과 사원으로서의 성취 같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내 인생 안에서 성취의 피드백 루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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