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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독노트

내 몸이 바로 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by 정다운


최종적으로 비출산을 선택했지만, 그 과정에서 종종 생각한 것들이 있다. 혹시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름에 내 성을 붙여 줘야지. 솔직히 딱히 내 성(뿌리)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굳이? 싶기도 하지만, 짝의 성을 붙이는 건 더 내키지 않는다. 제3의 성을 붙여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두 번째로, 누구에게도, 가족들에게 조차 최대한 오래 아이의 성별을 알리지 말아야지.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작은 세계 상상해 볼 때마다 무척 짜릿해서, 아이를 낳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마저 들곤 했다. 하지만, 아들이야 딸이야?라고 묻는 순수한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는게 가능할까? 가족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 무엇보다 내가 꿈꾸는 이상향을 내 자식의 삶을 통해 대리 실현하는 게 옳을까? 아, 그만 상상하자. 벌어지지 않을 일이다.

어떤 굳은 신념이 있다거나 깊은 고민 끝에 나온 생각은 아니다. 여성과 남성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많은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어색했고 반항심이 들었다. 누군가 “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웠다. 내 생각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다. 말로 설명하는 건 더 어렵다. 아마도, 내가 출산을 했다면 위의 것들을 실현하지 못하고 결국 굴복하고 말았겠지. 왜냐면 나에겐 설득할 언어가 없으니까.

이런, 평소 막연하게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들이 종종 정글 수업을 통해 설명될 때가 있다. 책을 읽고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생각을 나누며, 흐릿했던 생각이 또렷해질 때면 기쁘다. 그리고 한 편 슬프다. 그건 언제나 내가 속한 사회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게 되면 더이상 회피할 수가 없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면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4장 <성적 자기 결정권을 넘어서>에서 ‘성매매, 노동인가 폭력인가’와 ‘성폭력과 여성 몸의 공간화’ 크게 두 파트를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구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나는 4장이 '내 몸이 바로 나'라는 말을 모든 개념어와 담론과 사상을 긁어와 차근차근 설명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의 의미만 내 것으로 만들어도 이 독후감 쓰기(읽기)는 성공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알겠다. 평생 들어온 이야기고, 의심한 적 없는 이야기였다. 당연하잖아. 내 몸은 내 것이지. 하지만 ‘내 몸이 바로 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선명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읽는 동안, 읽지 않는 동안에도 그 말에 대해 내내 생각해야 했다. 나같이 한번에 못알아듣는 독자를 위해 저자는 부연한다. 내가 내 몸의 ‘쓸모’를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와 협상하는 삶을 의미한다.(p218)고.

‘내 몸은 나의 것’은 반성폭력 여성 운동의 구호가 된 말이다. 반성폭력 여성 운동은 성폭력이 정조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성폭력이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문제라고 말해 왔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남성의 여성 몸에 대한 공간화를 비판하는 논리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의 이항 대립에 근거하여 여성의 몸을 여성 자신의 공간으로 삼는 논리다.(p264) 이 논리로는 성폭력을 근절할 수가 없다. 계속 벽에 부딪힌다. 반면 ‘내 몸이 바로 나’라는 것은, 몸은 공간도 소유하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몸은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다. 몸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와 분리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내 안에 있는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 등 지금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 안에 산다. 그 외에도 수백수만수천 가지의 요소들에 의해 시시각각 움직이고 바뀌며 존재한다. 바로 내 몸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나를 파고들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남성 사회의 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 하지만 지금까지 써온 익숙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일은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항을 깨고 어항 밖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데, 깨진 유리 조각을 줍고 다시 어항을 만들 생각을 하면 휴, 막막하다. 그래서 다시 원래 있던 어항 속으로 들어간다. 제발 이 정도면 알아들어 주지 않을래? 화를 내고 소리지른다. 하지만 어항 속 언어로 아무리 소리 질러봤자, 여전히 우리는 어항 속이다.


어항 속에서 어항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어항을 깨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다면. 깨진 유리 조각따위 알 빠인가(알 바인가)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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