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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06. 2022

퇴사를 못하는 이유

브런치에서 인기 있는 주제가 몇 가지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퇴사인 것 같다. 세부 주제라 해봤자 다음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퇴사할 수 있을까요 고민, 퇴사 정말 해야 하는 걸까요 고민, 퇴사가 진짜 진짜 맞는 걸까요 고민, 퇴사했는데 일단 놀아야겠어요 응원해주세요 고민, 퇴사하고 인생 망했어요 어떡하죠 고민 등. 안 그래도 브런치에 넘쳐나는 퇴사 주제에 내 글을 보태야겠다. 어그로 끌기에 괜찮은 주제와 제목이다.



난 평생 돈과 명예를 좇았다. 미국 대학도 갔고 스타트업도 했다. 스타트업이 망했고 잘 나갈 것 같은 스타트업에 갔다. 스타트업은 잘 됐다. 젊은 나이치고 연봉도 많고 한 것치고 모아놓은 돈도 많다. 이런 조건이 되면 다 때려치우고 나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 줄 알았다.



대부분 퇴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를 모아둔 돈이 없거나 월급에 가까운 고정 수입이 없는 것으로 꼽는다. 그럴 만하다. 이런 조건이라면 퇴사는 무척 부담스러운 선택지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못하고 있나?



재밌지 않은가, 분명 난 내가 갖고 싶었던 걸 갖게 되었고 지금쯤 욜로족이든 파이어족이든, 아무튼 뭐든 하면서 살고 있어야 맞지 않은가? 최소한 더 이상 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최소한 더 이상 돈 때문에 일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아직 회사를 다니는 데는 다른 이유들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사회의 시선이다. 좀 더 보충하면 사회의 따가운 눈총이 약간은 두렵다. 이건 참 웃기는 거다. 지난 코로나 기간 동안 2년 넘게 재택근무했는데 점심시간마다 슬리퍼 신고 강아지 산책을 하면서 그 누구도 내게 "따가운 눈총"을 보낸 적이 없다. 눈총은커녕 앞에 누가 지나가는지 관심조차 없다. 그런데 사회의 시선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가? 내가 만들어낸 시선, 내가 내 안에 심어놓은 시선이 아니라면 그 시선이란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사회의 시선에는 부모의 시선 역시 상당 부분 포함된다. 퇴사 소식을 알리면 부모는 분명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날 볼 것이다. 부모의 걱정 역시 이해된다. 아끼는 친구가 퇴사를 한다고 해도 난 분명 걱정이 앞설 테니까. 하지만 회사 안에서 썩고 있는 자식의 삶을 더 걱정해주는 것이 부모로서 더 큰 사랑일 것이다. 더 이상 동네방네 자식 자랑은 못해도 회사 밖에서 더 행복한 자식을 보고 미소 짓는 것이 더 큰 사랑일 것이다. 냉정하지만 이건 부모의 문제다. 이건 부모의 숙제다. 부모가 자식 자랑 더 하도록 하는 건 내 문제도, 내 숙제도 아니다. 지난 평생 자식 자랑은 충분히 하게 했으니 이제 내 몫은 다했다.



두 번째는 소속감이다. 좀 더 정확히는 소속되지 않음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소속감이란 것도 참 재미있다. 정작 난 회사에서 그 어떤 개념, 그 어떤 이상에도, 그 어떤 사람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음을 아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속감이란 말인가? 그리고 대부분의 정직한 직장인이라면 알 것이다. 소속감이란 회사의 비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월급뿐이라는 것을. 매달 따박따박 박히는 월급에, 그리고 딱 그만큼만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지, 사장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비전과 목표 따위에 소속감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비전은 개뿔. 소속감의 상실, 소속되지 않음의 두려움? 좋다. 그러면 내가 진정으로 소속되고 싶은 곳을 찾아라. 그리고 그곳에서 소속감을 갖고 지켜내라. 그게 맞는 것 아닌가?



세 번째는 사랑하는 것 없음이다. 이게 제일 큰 문제인데, 사실 사회의 시선이나 소속감 같은 것은 비교적 작은 문제에 속한다.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사람은 올인하게 되어 있다. 강건한 사람이라면 뛰어내릴 수밖에 없을 때는 앞뒤 안재고 이곳이 로도스임을 알고 뛰어내린다. 일생에 한 번은 그런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내가 글을 너무 사랑하고 회사에 있는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저녁만 되면 집에 달려와 글 쓰는 게 너무 행복하다면, 그러다 한 때는 글 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다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내가 가진 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글 밖에 없다면, 내게 남은 게 글 밖에 없다면, 사랑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곳에 고통이 있어서 한참을 헤매다가 미워하고 헤매다가 울며 불며 다시 돌아와 붙잡은 것이 사실은 사랑, 아니 필요임을 깨달아도, 그렇게 써 내려가는 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없다면, 써 내려가고 또 써 내려가다가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게 나뉘기 시작할 때 그 간극이 더 이상 좁혀지지 않은 채 벌어지기만 할 때, 회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음이 분명 해지는 그 순간에 뛰어내리거나 어쩌면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무엇이 나를 회사로부터 밀쳐 떨어뜨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사건을 만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 스스로 일어나 날 밀쳐 떨어뜨린다. 사건은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 중 여름 3처럼 온다. 내가 먼저 사건을 만들지 않으면 언젠가 사건은 내게 닥쳐온다. 사건은 한 걸음씩 다가오지 않는다. 사건은 한순간에 닥쳐온다. 닥쳐온 사건은 날 배려하지도 위로하지도 않는다. 아, 단언컨대 내가 먼저 만들지 않아 닥쳐온 사건은 잔혹하다.



아 난 이런 걸 바랐던 게 아니야, 아 난 이럴 줄 몰랐어, 아 난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같은 개소리를, 대체 언제까지 할 셈인가? 아 난 이제 그런 개소리에 지쳤다. 개소리에 진절머리 난다. 아. 난 더 이상 그런 개소리를 참을 수 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내가 개를 끌지 않으면, 개가  끌고 간다. 내가  사건이 되어야 한다. 내가 사건  자체가 되어야 한다. 겨울 추위가 두렵다면 내가 추위가 되어야 한다는 법정 스님의 뜻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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