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를 어슬렁거리다가 할리 데이비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흰색으로 도장된 땅콩 모양의 연료 탱크부터 시작해서 뒤로 쭉 빠진 두 개의 크롬 머플러까지, 전체적인 실루엣이 마음에 들었다. 올라타서 시동도 걸고 배기음도 들었다. 카랑카랑 대는 할리 특유의 소리도 괜찮게 들렸다. 머플러 끝에서 올라오는 진한 가솔린 냄새, 온몸으로 번져가는 엔진의 떨림도 좋았다.
이런 짓도 많이 해봐서 그런 것일까, 옛날처럼 흥분에 도취되지 않는다. 대신 제3자의 시선으로 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내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살펴본다.
모터사이클을 향한 시각, 머플러를 향한 청각, 엔진에서 시작되어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촉각이 통합되어 하나의 정적인 이미지로 전이되기 시작한다. 메마른 땅을 흙먼지 날리며 할리와 함께 달리고 있는, 가죽재킷 걸친 카우보이의 이미지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장면이다. 영화이기도 하고 광고이기도 하다. 나는 분명 퇴계로 뒷골목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1인칭의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반면, 캘리포니아 데스밸리를 달리는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3인칭의 시점으로 상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 앞에 모터사이클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인가? 내가 욕망하는 것이란, 아니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어떤 대상인가 아니면 어떤 이미지인가? 그리고 그 대상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것의 이미지, 이미지의 주인공이 되는 또 다른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서인가?
내 앞에 할리를 보고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주장해보지만, 내 미의식이나 판단이란 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들이 이미 '나'로 고착된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말대로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니까. 내가 아름답다고 인식하는 그 무엇은 내 앞에 존재함이 틀림없지만 난 그것의 어떤 이미지, 그 이미지 속 '나', 얼굴 없는 타자들의 욕망 대상으로서의 '나'를 상상하고 있기 때문에 난 그것을 참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게 된다. 그러니까 난 그 앞에서 사실상 나, 나라는 하나의 상을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이 인식이라는 것 역시 상상에 불과하므로 인식이라 말할 수 없다. 모터사이클 앞에 선 나는 모터사이클을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할리 데이비슨 앞에 선 나는 모터사이클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미지 속 나를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욕망이란 것은 라캉의 말대로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모터사이클과는 무관한 게 되며 심지어 타자의 욕망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소유는 대상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소유로 대상은 소유물로 전락하고 이로써 자아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하는 수작에 불과하다.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닌 확인받는 것, 그러니까 이러한 수동의 존재에게 타자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손뼉 치는 관객에 불과하다. 소유물로 내 존재를 과시하고자 하는 것, 이때 타자는 철저히 무화된다. 아니, 프롬이 정의한 이런 "소유적 존재 양식"에 타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철저히 관객으로만 머물고 이들에게는 조명이 비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끊임없이 손뼉 치는 것, 그것이 그가 타자들에게 부여한 역할이다. 무대에서 나는 홀로 주인공의 역할에만 충실하려 할 뿐, 나 아닌 누군가를 무대에 세워 조명을 비춰주는 것, 그에게 손뼉 치며 열심히 들어주는 것, 그의 이야기에 감화되는 것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파시즘은 멀리 있지 않다.
세 대의 모터사이클을 소유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최소한 그것이 자의식의 비만 상태를 방조하고 악화시키기만 한다면 더욱 그렇다. 다만 내 의식의 흐름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책무는 있다. 내 인식의 작용, 호오의 상, 관념 체계 등등에 대한 신뢰, 또는 신뢰라고 하는 이름 뒤에 숨은 익숙함, 안일함, 태만함은 새까만 재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한 번에 하나씩, 새로 배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이다. 물론 글로 그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믿진 않는다. 다만 제3자의 시선에서 나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불교의 연기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상호의존의 필연성이다. 그 무엇도 또 다른 무언가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서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연기법의 가르침이다. 홀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오만이다. 인격화된 타자를 잠시 배제하고, 나는 정말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 산소가 사라지면 나는 대략 2분 30초 안에 의식을 잃기 시작하고 이 상태로 몇 분이 지나면 뇌사 상태에 빠지며 장기와 세포는 그 기능을 멈춘다. 죽음이라는 필연은 나와 채 몇 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세상에 물이 사라지면 나는 채 10일도 못 버티고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먹을 음식이 사라지면 길어야 한 달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소와 물과 음식, 세 가지에게 의존적인 것인데, 이것 역시 신체에게 아주 우호적인 조건일 때만 가능한 지극히 순진한 가정이다. 지구가 지금보다 태양과 조금이라도 멀거나 가까워서 지나치게 차갑거나 뜨겁다면 애초에 나는 존재할 수조차 없다. 거기다가 만약 지구가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을 멈춘 채 365일간 태양을 공전하기만 한다면 지구의 6개월이란 시간은 낮이기만 하고 나머지 6개월은 밤이기만 하다. 그런 조건이라면 생명은 살기 힘들다. 생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는 다른, 외계의 것처럼 아주 이질적인 모양일 것이다. 그렇다면 벌써 나는 적절하게 자전하고 공전하는 지구와 그 안에 산소, 물, 음식에 의존적인 게 된다. 지구가 태양과 달, 태양계 안 행성들과 물리적인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것처럼, 산소, 물, 음식 모두는 유기질과 무기질과 같이 각각 의존하고 의존되는 것이 있으므로 나라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거듭에 거듭을 넘어 이미 무한에 가까운 것들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복잡계 그래프에 하나의 항이 빠지거나 미세하게 달라져도 그래프 전체는 달라진다. 완전하게 달라진다. 이것만 봐도 존재는 곧 의존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인간 이전에 하나의 유기체로서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이미 모두 결정적으로 의존적이다. 마뚜라나가 말한 "생물학적 근본 특성들"은 유기체들 간에 기초적이고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상호의존성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이미 무한의 존재들, 그것들 각각의 생산물과 또 그것들의 배치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소유는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가? 좀 더 적확하게, '나만을 위한' 소유, 타자를 배제한 소유는 대체 무슨 소용인가? 내 생산물로, 어쩌면 그것마저 '나의' 생산물이라 말할 수조차 없지만, 그렇게라도 무언가를 생성해서 티끝만큼도 기여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 땅 위에 나란 존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기여할 것도 없이 홀로 우뚝 설 수 있을 거란 어리석음, 그 어떤 의존에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적인 오만함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단 2분간 산소 없는 세상에 살길 바란다. 그때는 아마 깨달을 것이다. 그때 내가 유일하게 욕망하는 것은 산소 단 하나, 산소라는 유일하고 결정적인 타자 외에 그 어떤 것도 없을 것이다. 폐포가 쪼그라들어 숨이 턱턱 막히는 그 절실함 속에서 아마 깨달을 것이다. 자기 중심성, 그 오만한 자기 중심성은 그 어떤 것도 아님을, 다른 존재 없이 '나'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음을, 다른 존재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