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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Jun 07. 2023

퇴사 준비

퇴사와 이혼 이후의 삶에 대해서 난 그 어떤 것도 모른다. 완벽한 미궁이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다음을 생각지 않았던 적이 없다. 늘 다음, 그다음, 그다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 모르겠다. 퇴사와 이혼 모두 몇 주씩 남았지만 이미 난 미궁 속을 헤엄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괜찮다. 이건 의도적인 실험이니까. 이럴 줄 알았으니까.



불안은 모름에서 온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모름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다. 모름 대신 앎으로 채워 넣기, '무엇'으로 공백을 밀어내기, 그만큼 불안을 제거하기. 이것이 지난날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모름은 때로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계획에 없던, 절대 예상할 수 없었던 놀라움 말이다. 그리고 어떨 땐 이 놀라움이 삶의 핸들을 과격하게 꺾어버리기도 한다. 놀라움은 매혹됨이고 힘이다. 반면 불안은 삶의 궤적을 바꿔놓을 힘이 없다. 그래서 늘 제자리다.



다음을 모르는 것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가, 모르는 상태에 한동안 아님 오래간 머무는 것이 피실험체를 어떻게 몰아가는가, 피실험체는 과연 미쳐버릴 것인가, 또는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무언가를 느끼거나 알게 되어 자신도 몰랐던 무언가가 될 것인가, 피실험체는 정말 괜찮을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건 피실험체는 괜찮을 것이다. 나름의 어려움이 없지 않겠지만 모른다고 죽을 일도 아니기 때문에 안 괜찮지도 않을 것이다.



피실험체는 허세가 상당하고 그것을 본인에게 숨기는데 도사기 때문에 그의 말과 글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의 데이터로 보아 피실험체는 현재 불안하지도 안 불안하지도 않은 나름의 안정기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피실험체의 우호적인 실험 환경을 위해 신용카드 한도를 최대치로 늘리고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한다.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모른다. 삶의 놀라움은 때로 경악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금이 왕이다.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현금화에 나선다. 지난 1년간 쓴 적 없는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을 죄다 갖다 버리거나 판다. 회사에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퇴사 후에 필요할 몇 가지 중요 이메일을 개인 계정으로 전달한다. 그간 삼촌들 이모들에게 받기만 받았지 내가 용돈 준 적 없어 미안했던 사촌 동생들에게 용돈을 보낸다. 이것으로 퇴사에 필요한 준비는 마쳤다.



앞으로 2주 남은 퇴사까지 피실험체의 퇴사 전 마지막 프로젝트는 무책임함 실험이다. 끝내기로 조직장과 약속했던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약속과 책임, 그것은 피실험체가 오래간 숭상해 왔던 가치였다. 하지만 피실험체는 이제 그딴 게 싫다고 한다. 특히나 회사에선. 그리고 회사 밖에서도 그 둘은 사람을 조종하는데 자주 이용된다. 회사 사람들은 그를 욕할 테지만 그는 그런 게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는 비난은 그저 바람소리 같은 것이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강은 건넜으니 타고 온 나룻배를 불태우자. 퇴로를 끊자. 아주 바람직해 보인다.


이렇게 지난 10년의 커리어도 끝장낸다. 그래. 난 삶을 살러 왔지 커리어를 살러 온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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