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by 정이든


-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이런 질문을 종종 받곤 했다. (텍스트만 적고 보니 조금 비꼬는 말투처럼 들리는데, 대화 맥락상 대부분 순수한 호기심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회사생활 외에 하고 있는 활동들, 이를테면 글쓰기나 코칭이라든지 책 읽기, 요가나 러닝, 보드게임 소모임 등에 대한 나의 열정을 한참 떠벌리던 참이었다.


- 그러게요. 왜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할까요.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라고 솔직히 답하려다가, 조금 없어 보일 것 같아 머쓱한 표정으로 웃어넘겼다.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왜' 이 활동들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명확히 모르는 것 같다. 물론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어설프게는 인지하고 있다. 책을 출판하겠다는 꿈이 있어서 글을 쓴다. 코칭은 타인에 대한 기여감을 준다. 운동은 내 몸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며,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연결감도 중요하다.


그러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왜 책을 꼭 출판해야 하는지, 기여감이란 대체 무엇인지 등을 물어본다면 또 말문이 막힐 것이다.


왜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하는가. 그 활동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열심히 산다는 것은 에너지를 열심히 쏟는다는 것과 같은데, 굳이 에너지를 쏟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어느 질문도 선뜻 대답할 자신이 없다.


사람은 '왜'를 쫓는 존재다. 무엇이든 이유를 알아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비로소 안심하고 전념할 수 있다.


이유를 쫓다 보면 필연적으로 '인간은 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거창하고 본질적인 담론들을 꺼내기에 아쉽게도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자라 한들 수학 문제집의 답안지처럼 명확하게 삶의 이유, 의미를 설명하고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싶다. 유한한 경험과 깨달음 속에서 적당한 가설을 제시하는 것 외에 말이다.


대신 '왜 열심히 사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개인의 입장을 표명하는 정도는 나처럼 평범한 한국의 직장인도 감히 해볼 수 있는 시도라 생각한다. '왜 열심히 사느냐'는 '왜 사느냐' 시리즈의 하위 카테고리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도 충분히 유의미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다.


논외로, 누군가가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를 비교 측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 속도와 밀도를 명확히 측정할 수도 없거니와 수없이 다양한 각자의 맥락과 목표들 간 비교우위를 정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거나, 시행착오를 겪고 있거나, 그저 멈추어 둥둥 떠 있다 한들 그것이 열심이 아닌 증거는 될 수 없다. 모든 이는 각자의 삶에 충실하다. 속도와 방식이 다를 뿐이다. A라는 사람의 삶을 하나의 무대로 본다면, A보다 더 그 무대에 열심일 사람이 없다.


*


최근 한 친구와 살아가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느냐'는 테마로 대화가 흘러갔다. 그 친구는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외의 순간에는 잔잔한 자신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했다. 내 의식의 흐름, 그러니까 새롭게 시도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삶에 무책임한 느낌이 든다는 것에 대해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공감하지 못한다고 하여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며 나도 마찬가지로 친구의 방식에 대해 무척 존중하였으므로 훈훈하게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친구는 장류진 작가의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었다. 여행 에세이는 읽어본 적이 거의 없는데, 한번 읽어봐야겠다. 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시도하다 보면 의미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내 나름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의미는 고정된 이정표가 아니다. 한때 삶을 지탱하던 거창한 목표가 어느덧 흐릿해지기도 했고, 가볍게 시작한 소모임이 삶의 중심축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스무 살, 서른 살, 그리고 지금의 내가 추구하는 의미가 매번 달랐던 것처럼 말이다.


한참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많을 때는, 문장으로 표현가능한 수준으로 내 삶의 방식과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부딪혀 보는 것과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정의는 자주 그리고 무력하게 바뀌어 왔다.


나는 모든 것을 경험해 보거나 판단할 수 없다. 나의 판단은 가설적이고 자의적이다. 따라서 절대적 참이 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만고불변의 의미에 집착하기보다는 저변을 넓혀 가면서 판단을 보완해 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의미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의미란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계속 바뀌는 것이므로 어떤 삶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더 의미 있는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을 뿐 그 과정은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정의 내리든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돈이 많아야 해, 회사원이라면 응당 임원이 되어야 해, 인스타 유명인이 되면 좋겠어, 와 같이 타인이 내린 정의를 참고할 수는 있겠으나 그 또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므로 나만의 색깔로 의미를 덧칠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의미가 있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시작했기에 의미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공들여 적는 문장과 가쁜 숨을 내뱉는 운동,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들 속에 당장 거창한 이유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열심히 조금씩 하다 보면 그럴듯한, 거창한 이유까지도 끼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의 당위성 만으로도 '열심히 사는 것'의 의의가 있다.




-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 글쎄요? 열심히 살다 보면 이유는 어떻게든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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